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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고향, 그 사라져가는 서정을 찾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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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 Books 편집장 (gohkh@joins.com)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차마 꿈엔들 잊지 못할 시인의 고향은 어떤 곳일까요.

"마을 뒤로 병풍처럼 둘러선 산등성이가 심상치 않다. 한일자로 쭉 뻗어갔기 때문에 붙여진 듯, '일자산'의 깊은 계곡을 막은 고수골 저수지에서 흘러나온 물이 마을 한복판을 가로질러 넓은 들판으로 흘러든다."

시인 정지용 님의 고향 마을을 찾은 〈정지용 연구〉(민음사, 1997년 펴냄)를 낸 바 있는 서강대 명예교수 김학동 님의 글입니다. 소학교 다닐 때 선생님을 따라 무시랭이(이 마을의 골짜기 이름) 뒷산에 올라 진달래꽃을 한아름 꺾었다는 정지용 님의 짧은 글을 읽고 그곳이 궁금해 김학동 님은 이곳을 찾은 적이 있었답니다. 이번에 김학동 님은 〈문학기행, 시인의 고향〉(새문사 펴냄)을 냈습니다.

전국 팔도를 직접 떠돌면서 현대 문학사의 주요 시인 44인이 남긴 발자취를 찾아냈습니다. 80년대 초부터 시인의 고향을 찾아 떠돌기 시작했다니, 20년이 넘게 걸린 노작이지요. 이 책은 목차만을 봤을 때 여행 안내서의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경기도에서 시작해 강원, 충남, 충북을 거쳐 경북 지역까지 전국을 두루 훑어냈습니다.

홍사용, 심훈, 한용운, 이효석, 이육사, 이상화를 비롯, 박두진, 박목월, 신석정, 박인환을 거쳐, 신동엽, 박용래, 신석초, 서정주, 김춘수, 박재삼, 정호승에 이르기까지 현대 시사(詩史)의 주요 시인들의 발자취를 모두 담아냈더군요.

정지용 님의 해금 운동을 벌이기도 했던 저자가 살펴 들려주는 정지용 님의 고향 이야기는 각별합니다. 그의 시 〈향수〉는 이미 대중가요로도 널리 불리고 있지만 그의 고향 충북 옥천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바 없지요.

정지용 님은 충청북도 옥천읍 하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마을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실개천을 떠올리면서 정지용 님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라고 썼습니다. 저자의 관찰에 따르면 시인의 고향은 시〈향수〉의 한 장면과 꼭 같다고 합니다.

저자는 지금은 거의 사라져가는 시인의 옛 흔적을 찾아 정처없이 떠돕니다. 정지용 님이 다녔던 죽향초등학교를 찾아, 그 학교를 둘러싼 자연 경관의 시적인 이미지를 찾아냅니다. 한지로 돼 깨끗이 보관된 정지용 님의 학적부를 들여다 보는 일도 잊지 않지요. 이어서 정지용 님이 일본 유학 시절 이후 다녔다는 성당에 들러보지만 시인의 발자취를 더듬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장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현대시 연구자로 잘 알려진 김학동 님의 시인의 고향에 대한 묘사는 그가 그 시인의 시를 잘 알고 있는 까닭에 남다른 데가 있습니다. 단순한 여행가나 호사가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을 듯한 초라한 초가집과 낡은 학교 건물에서도 시인의 발자취를 찾아내려 안간힘 하는 것을 역력히 눈치챌 수 있습니다.

시인들이 묘사한 고향 마을과 농촌 풍경을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면서 저자는 "자칫 허구로 간주되기 쉬운 것도 그 실체를 확인하고 나면, 시의 해석에서 전혀 딴 시각이 마련돼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머리글에서 털어놓습니다. 문학 연구자가 아닌 일반 독자들에게는 시인의 고향 마을의 풍경을 만나면서 그의 작품을 보다 친근감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겠지요.

노작 홍사용 님이 〈눈물의 왕〉을 그려내던 경기도 용인의 장군바위, 심 훈 님의 대표작 〈상록수〉에서 어둡고 궁핍한 농촌을 일깨우고 되살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박동혁이나 채영신의 활약을 어슴푸레 그려볼 수 있는 충청남도 당진읍, 신석정 님의 초기 시에 자주 소재로 삼았던 은행나무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전북 부안읍.

문학을 여행의 주제로 삼는 경우는 드물지 않습니다. 시인이나 작가의 고향은 작품의 모티브로 작용한 경우가 많은 까닭이겠지요. 특히 자연의 서정에서 에스쁘리를 찾아내던 옛 시인들의 고향을 찾아 떠나는 여행 길은 남다른 맛이 있는 법이잖아요. 그것이 거의 스무 해에 걸쳐 시인의 고향을 찾아 다니며 기행문 형식의 글로 묶어낸 김학동 님의 이 책에 손이 가는 이유일 겁니다.

시인의 고향을 그려내며 가끔씩 김학동 님은 흥에 겨워 스스로 시인이 되기도 하지요. 심 훈 님의 고향 바닷가 송림 언덕 위에 홀로 섰을 때의 시흥은 저절로 시를 쓰게 했다면서요. 그러나 완성된 하나의 시가 아니고라도, 거의 한 일생을 현대 시 연구에 바쳤던 김학동 님이 쓰신 대부분의 글은 기행문 그대로 시처럼 아름답게 읽힙니다. 시어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자신의 글에 녹여낸 것입니다.

휴가철이 이제 종막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람 없는 한적한 바닷가나 시골 마을을 찾고자 하는 독자들이라면, 시인의 고향을 찾아 김학동 님처럼 시흥에 겨워 시 한 수 지으며 이 나라 이 땅을 걸어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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