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새로운 〈김대중 옥중서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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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일이군요. 1993년 애서가클럽이라는 민간단체에서 주는 제3회 애서가상 수상자로 예기치 않던 두분이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고 부쩍 기자적 관심이 동했더랬습니다.

한분은 '국졸 학력의 책 컬렉터' 박영돈씨였고, 다른 한분은 당시 야당대표 김대중 대통령이었죠. 그 사람이 그 사람 아닌 선택이 신선하더라구요.

박씨 경우 은행 수위 출신이지만 중국의 고탁본(古拓本)까지 소장한 멋쟁이 호사가이고, 김대통령이야 세상이 다 아는 책벌레 아니던가요?

당시 기자는 김대통령 서고를 힐끗 확인할 수 있는 기회도 가졌습니다. 수상기념 컬렉션전을 준비하는데, 전시될 책 수백권이 막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손때 묻은 것들인가, 장식용인가 부터 훑었습니다.

쌓아놓은 책더미는 한눈에 김대통령이 신학.철학을 포함한 인문학과 경제분야에 치밀한 독서를 한 사람임을 직감케 했습니다.

상당수 책들이 1980년 내란음모사건 수감 기간의 흔적이라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죠.

마침 관심있게 본 신간 〈김대중 옥중서신〉(한울)이 이 기억을 되살려줬습니다.

오랫동안 절판된 책에 하드커버를 씌워 점잖게 나온 신간은 그가 감옥에서 보냈던 편지 29통과, 가족들에게 차입을 부탁했던 책의 목록을 재록하고 있습니다.

"인류애에 뿌리를 둔 종교적.정치적 원칙들에 대한 헌신을 보여준다." 책을 뒤적이니 아웅산 수지여사가 지난해 5월 이 책의 스웨덴판 서문에서 했던 말이 보이는데, 기자는 이 말에 흔쾌하게 공감합니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의 말이 아니라, 편지 형식을 빌린 문명비판으로 읽어도 손색이 없고, 야스퍼스〈철학적 신앙〉, 니체 〈이 사람을 보라〉등의 독서목록은 지금도 낡지 않은 권장도서 목록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러나 이 다음부터가 영 켕깁니다. 핵심은 '그 훌륭한 책과 지적 재산이 청와대 안에서는 어떻게 관리되고 시스템화되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죠. 그 장서의 행방을 묻는 게 아닙니다.

대통령을 포함한 그곳의 스태프들이 정책결정을 할 때 필요한 도서
들이 청와대 도서관 공간을 통해 어떻게 지원되고 공유되는지가 영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92년 5월 출판계에서는 청와대 안에 도서관을 짓고, 양질의 기본 도서들을 추려 들여보냈습니다. '정책입안 제대로 하라' 는 주문이 섞인 녹서재(錄書齋)는 그래서 탄생한 걸로 기자는 압니다.

문헌정보학자까지 동원된 표준도서관 기획단의 꼼꼼한 설계안이 받아들여졌던 것이죠. 그러나 뜻있는 출판계 사람들은 이 시설이 어떻게 유지되고 활용되고 있는지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지속적인 책 구입의 버전업 소식을 들어본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가정과 개인은 풍족해도 막상 공적 부분은 빈곤한 우리 실정을 상징하는 듯 보여 영 우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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