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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줄에 매달린 강호의 검객

중앙일보

입력

몇 년전 워쇼스키 형제의〈매트릭스〉가 할리우드와 동양을 정복했었다. 원화평의 홍콩식 와이어 액션과 120대의 카메라를 동원해 초당 12,000프레임을 찍어내는 flow-mo 촬영기법의 결합은 건물 벽과 천장을 달리고, 중력을 무시하면서 공중에 떠있는 3차원 액션을 가능케 했다.

21세기 테크노 바벨인 매트릭스에서 불가능한 임무란 게다가 없다. 쿵푸는 더 이상 수련의 대상이 아니라, 디지털 세계에 있는 하나의 정보에 불과하다. 누구나 기억 세포에 정보만 입력하면 순식간에 무술의 달인이 될 수 있다.

〈매트릭스〉는 SFX 테크놀로지의 신기원을 만들어냈고, 디지털 세계에서 서구의 테크놀로지가 어떻게 동양의 정신(혹은 기예)과 결합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매트릭스〉에 비하면 서극의 SFX나〈중화영웅〉은 장난처럼 보였다. 게다가 존 우의〈미션임파서블 2〉에 이르면 이소룡, 이수현, 이연걸, 주윤발이 서 있던 자리에 키에누 리브스, 톰 크루즈가 선글라스를 끼고 폼 나게 서 있는걸 보게 된다.〈매트릭스〉와〈미션임파서블 2〉는 홍콩식의 무협(액션) 영화에 사망 선고를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동양의 고수들은 디지털 테크놀로지 환경에서 죽었다기 보다는 다만 사라져 있었을 뿐이다. 갑작스레 우리는 이안의 〈와호장룡〉과 만났고, 할리우드가 무공의 비법을 훔쳤을 뿐 여전히 무협의 시간과 영웅의 운명을 훔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무공을 수련하기 위해서는 늘 시간이 필요하고, 검에도 마찬가지로 역사와 시간이 담겨 있다. 그래서 이안의〈와호장룡〉은 검과 영웅의 운명이 여전히 동양의 사유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가운 소식처럼 보인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결합하지 않은 와이어 액션은 한물 간 것처럼 보였었다.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보이는 와이어 액션이 현실감을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와이어 액션은 와이어(줄)를 숨기는 액션이다. 하지만 이안의 〈와호장룡〉에서 우리는 더 이상 숨겨진 줄과 만나지 않는다. 드러난 와이어 액션과 드러난 줄이 만난다. 청명검을 훔친 용과 그녀를 뒤쫓는 수련의 액션은 거의 10여분에 달한다. 아마 대부분의 관객은 이처럼 긴 시간의 와이어 액션에 놀랄 것이다. 편집을 가능한 자제하고 고속 촬영을 배제한 액션에서 우리는 시공간의 묘한 감각을 눈이 아닌 몸으로 체험한다.

무예를 통해 정신적인 상태(선)나 사유(득도)를 겨냥하면서도 이안의 〈와호장룡〉은 호금전의〈협녀〉와 달리 편집에 의존하지 않고, 단지 그들의 기예를 전시할 뿐이다. 대나무 숲에서 용과 리무바이(주윤발)가 중력의 무게와 싸우는 것처럼 관객 또한 어떤 중력과 싸워야만 한다. 중력을 견뎌내기 위해 와이어가 필요했다. 보이지 않는 줄에 매달린 중국인형처럼 무사들은 운명의 어떤 줄에 매달려 있다. 그 줄이 끊어지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지붕 위를 무중력 상태로 뛰어 다니는 용(장지이)과 수련(양자경)의 경공술을 볼 때 객석에서는 먼저 웃음이 터져 나온다. 웃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웃음이 터져 나오는 시간은 와이어 액션이 보여지는 시간을 감당하지 못한다. 웃음은 점점 감탄으로 바뀌고 그들이 지상에 도착하면 안타까운 탄식이 남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또한 날고 있다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와호장룡〉에서 보여지는 와이어 액션과 이동촬영의 결합은 용과 수련을 따라 우리의 눈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몸이 움직이고 있는 느낌을 만들어낸다. 수련이 벽에 무중력의 상태로 매달려 있을 때 나의 몸은 마찬가지로 왼쪽으로 기울어진다.

경공술의 대가인 리무바이와 수련, 용이 밟고 있는 지상과 분리된 가벼운 공기층이 중력의 무게를 견뎌내는 안정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만 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지상에 내려오면 기억과 집착, 인간적인 분노와 고뇌의 감정을 보여주기 위해 또한 엉킨 줄이 필요하다. 헤시오드가 말했듯 한 종류의 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곳에는 두 종류의 줄이 존재한다. 와이어는 지상과 분리돼 중력을 견뎌내게 하는 버팀목이지만, 지상에 내려오면 그 줄은 운명의 질긴 줄처럼 작동한다. 어느 누구도 그 줄을 벗어나 자유롭긴 힘들다.

무당파의 대가인 리무바이가 강호를 떠날 결심으로 청명검을 버리는 것은 그 검과 더불어 생긴 질긴 운명의 연(緣)을 끊고자 함이다. 용은 무당파의 비급을 훔치고, 자신의 무공이 스승인 푸른 여우를 능가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자 혼란에 빠진다. 용이 청명검을 훔치는 것은 그녀가 동경하는 강호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용의 행위는 강호의 삶에 얽힌 질긴 운명의 줄을 당기고 밀치고 꼬이게 만들었을 뿐이다.

와이어 액션이 마치 그들처럼 자유롭게 우리가 공중을 날아다니는 느낌을 선사했다면, 리무바이와 용의 집착과 미련, 수련과 호의 기다림은 그들도 우리처럼 집착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란 걸 보여준다. 할리우드의 어떤 홍콩식 액션 번안도 아직 이런 공감을 만들어주진 못했다. 그들은 단지 운명의 줄(와이어)를 디지털로 제거하고, 무술 수련에 따르는 시간을 정보화 했을 뿐이다. 할리우드가 디지털 검으로 강호를 제패하고, 동양의 고수들이 모두 로닌이 되어 떠돌아다니는 무법천지에서 이안은 이렇게 말한다: 여전히 영웅과 전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와호장룡〉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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