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고통에 함께 반응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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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ins.com 오현아 기자(perun@joins.com)

시뻘건 속을 드러내며 갈라지는 땅,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고층 건물, 허리가 꺾이며 두 동강 나는 고가도로, 불길 속에서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1995년 지진이 났던 일본 고베 지역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돌무더기 너머 하얗게 피어 올랐던 고통이 몇 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우리네 삶에까지 영향을 미칠까.

6개의 연작 소설로 이루어진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김유곤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는 모두 고베 대지진을 테마로 다루고 있다. 주인공들의 삶은 알게 모르게 고베 대지진의 영향을 받는다. TV 모니터 속의 고통을 응시하다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이 갈라지듯, 잊고 지냈던 아픔이 툭툭 불거져 나온다.

〈쿠시로에 내린 UF0-어떤 '이혼 선언' 이후〉 주인공의 아내는 밤낮으로 고베 지진 뉴스만 응시하다 어느 날 이혼을 선언하고 사라진다. "당신의 내부에는 나에게 주어야 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마치 공기 덩어리와 함께 살고 있는 것 같아요"라는 짤막한 편지만을 남기고.

들판 한가운데에 내려온 UFO를 보고 일주일 후 가출한 쿠시로의 한 부인처럼 그렇게 사라진 것이다. TV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고베 사람들의 절규가 자신의 내부에서도 들린 것일까.

고베에 아내와 아이들이 있지만 해안가에서 모닥불만 피우는 중년의 화가(〈다리미가 있는 풍경-모닥불이 꺼지면 같이 죽어요〉), 자기를 버린 '그 남자'가 고베의 폐허에 묻혀 죽기를 바라는 중년의 여의사(〈태국에서 일어난 일-마음 속의 돌〉) 등 주인공들은 모두 아픔을 가지고 살아간다. '몸 속에 들어 있는 어린애 주먹만한 희고 딱딱한 돌이 독이 될 때까지'.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개에게 물어뜯긴 귀를 가진 아버지〉에서 요시야는 개에게 물려 오른쪽 귓볼이 없다는, 아버지처럼 생긴 낯선 남자를 따라간다. 어머니는 지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고베에 가고 없다. 막다른 골목길에서 남자를 놓친 요시야는 드넓은 야구장으로 이끌린다. 하얀 달빛을 받으며 요시야는 풀과 구름의 흔들림에 몸을 맡긴다.

춤을 추면서 요시야는 깨닫는다. 숲 속에서 짐승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어도 숲과 짐승 모두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그래서 공포 따위는 애초부터 없는 거라고. 어머니가 갈라진 땅 고베에 가 있는 사이, 자신의 근원을 찾기 위해 헤매던 요시야는 제의의 춤을 추면서 상실감을 극복한다.

소설가 쥰페이는 대학 시절부터 사랑했던 사요코가 이혼을 하자 그녀의 딸 사라를 돌보는 어설픈 '대부' 역할을 맡는다. (〈벌꿀 파이-소설가 쥰페이의 사랑〉) 사라가 고베 지진 뉴스를 본 뒤 '지진 아저씨'가 자신을 상자에 억지로 넣으려 한다며 밤마다 울기 때문이다. 사요코와 첫 섹스를 하는 날, 쥰페이는 결심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꼬옥 껴안고, 누군가가 꿈꾸며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소설"을 쓰겠다고.

고베 지진 뉴스에 밤마다 비명을 지르고 사랑하는 여자의 딸을 위해 '벌꿀 파이'가 나오는 해피엔딩으로 이야기를 끝맺음하는 것, 바로 이것이 타자의 고통에 반응하는 것이 아닐까.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고 해도, 대지가 소리를 내며 갈라진다고 해도' 말이다.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이 아무리 견고해 보여도 땅 속 저 은밀한 곳에 지진 진원지가 있는 한, 나의 삶 역시 위태로운 것일 수밖에 없으므로.

타자의 세계에까지 관심 분야를 넓힌 하루키의 모습은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 독가스 사건'을 다룬 논픽션〈언더그라운드〉에서 이미 확인해볼 수 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소설을 쓰겠다'는 쥰페이를 하루키 자신으로 볼 수도 있지만 '상실의 시대'에서 '그 이후의 시대'로 비약할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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