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크 덕분에 스타됐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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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경기 중에 용어가 가장 방대한 게 야구라고 하는데, 스타크래프트는 그 세 배쯤 되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다들 그대로 쓰지만, 처음에는 영어로 된 게임용어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고민이었고요. '머린' 은 '수병' 으로, '커맨드 센터' 는 '사령부' 로 한다고 해도 'SCV' (테란 종족의 자원을 생산하는 일꾼)는 옮길 방법이 없잖아요. 이거 안되는 거 아냐, 하고 포기할 뻔하기도 했습니다."

국내 게임캐스터 1호 정일훈(31)씨가 게임해설자 엄재경(32)씨와 케이블채널 투니버스에서 처음 게임중계를 시작한 지난해 5월을 돌이키는 말이다.

바둑.야구처럼 게임을 TV로 중계한다는, 당시로서는 황당한 발상으로 시작한 게임중계는 정규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고 급기야 게임전문 케이블채널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지상파방송까지 게임중계를 시도하는 등 '중계전문가' 도 속속 등장했지만, 출전선수들의 이력을 줄줄이 꿰면서 판세를 예리하게 짚어내는 이들 콤비의 노하우에는 한참 못미친다.

현재 게임 전문 채널 온게임넷의 고정 게임중계 콤비로 활동중인 이들의 인기는 '유행어 리스트' 가 인터넷에 회자할 정도. 기발하다 못해 때로는 무모한 공격전술을 펴는 선수를 향해 '엽기로 흥한 자 엽기로 망한다' 고 일갈을 날리는 중계는 관전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캐스터 정일훈씨는 고려대 서어서문학과 재학 중 '쓰리랑부부' 등 방송사 코미디 아이디어작가로 일하면서 일찍부터 방송에 꿈을 품었고, 동아TV 개국과 함께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지금은 경인방송 '생방송 모닝데이트' 를 진행하는 등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그가 "다른 프로 섭외 안 들어온다" 는 선배.동료의 충고를 무릅쓰고 게임캐스터로 나서게 된 것은 대학방송국 후배인 당시 투니버스 황형준 PD의 꾐 때문. "스타크 중계 한 번 해보자" 는 제안에 "그거 좋은 생각" 이라고 맞장구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이 걸작이다.

"스타크가 뭔데?"

동네 PC방 고수들을 어깨너머로 지켜보며 중계연습을 했다는 정씨와 해설자 엄재경씨는 그래서 처음부터 서로 필수적이었던 보완관계.

엄씨는 스타크래프트광이었지만, 방송은 왕초보라 안경.시계를 만지작거리다 NG를 내기 일쑤였던 것. 고려대 중문과 재학중 초등학교 동창인 만화가 이충호씨의 '마이 러브' 작업에 동참하면서 만화 스토리작가가 됐다.

두 사람의 히트작 '까꿍' 의 애니메이션 작업을 황PD와 의논하다 엉뚱하게 게임중계 '부업' 에 의기투합했다.

엄씨는 스토리작가의 기질을 살려 출전선수들과 릴레이 인터뷰로 인용할 만한 말을 메모하는 등 사전 준비에 적잖은 공을 들이는 것이 강점. 여기에 종족별.맵(전투지형)별 승패를 스스로 집계, 분석하는 꼼꼼함이 더해진다.

반응 빠른 시청자들은 "게임 보려는 거지 중계 보려는 거냐" 며 그의 다변을 꼬집기도 하지만, "그나마 정일훈씨가 치고들어와 잘라줘서 그 정도" 라고 답하는 품새가 밉지 않다.

프로게이머처럼 한국의 독특한 스타크래프트 열풍 덕에 스타가 된 이들이지만, 그에 대한 걱정도 적지 않다.

붐처럼 프로게임구단을 창단했다가 소리소문 없이 해체하는 등 돈벌이 욕심에 뛰어든 어른들이 젊은 선수들의 미래를 배려하지 않는 풍토를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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