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서열 급상승 장성택, 9년전 서울 룸살롱 갔다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25일 조선중앙TV가 방영한 24일 조문 사진. 김정은(가운데)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의 고모부인 장성택(맨 왼쪽) 국방위 부위원장이 대장 군복 차림으로 등장했다. 장성택의 군복 입은 모습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장 칭호도 최근에 급박하게 부여된 것으로 보인다. 왼쪽부터 장성택, 이영호 총참모장(차수), 김정은, 김영춘 인민무력부장(차수), 이용무 국방위 부위원장(차수). 뒷줄에 김영철 정찰총국장(상장·오른쪽 원)도 보인다. [조선중앙TV=연합뉴스]

김정은의 고모·고모부인 김경희(65) 당 경공업부장과 장성택(65)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김정일 사후 재편되고 있는 북한 권력의 전면에 등장했다. 25일 조선중앙TV는 전날 김정은(27)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이 금수산기념궁전을 참배하는 장면을 전하면서 대장 계급장을 단 군복 차림의 장성택 모습을 방영했다. 그가 군복을 착용한 모습이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김정은의 왼편 이영호 총참모장 바로 옆자리였다. 시신 공개 첫날(20일) 둘째 줄에 서 있던 김경희 부장은 23일엔 맨 앞줄로 나왔다. 19일 발표된 장의위원 명단엔 15위였지만 20일과 23일 참배할 땐 순서가 5위로 급상승했다.

 김정일 사망 후 일주일 사이에 일어난 급격한 권력 쏠림 현상이다. 북한 핵심 권부에서 김정일의 가족인 ‘김(金)·장(張) 부부’의 위상이 크게 높아진 것이다. 이를 근거로 일각에선 두 사람의 섭정을 고리로 한 군부 집단지도체제를 예고하기도 하지만 북한의 통치 구조상 현실성은 낮아 보인다. 대신 집단 보좌체제의 중심축에 두 사람이 섰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갖는다.

 장성택은 2008년 8월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김 위원장의 친여동생인 부인 김경희와 함께 ‘병실 문고리’ 실세로 부상했다. 최고 권력자 바로 곁에서, 공식 직함을 지닌 권력자들의 접근을 통제하면서 측근으로서의 권력을 다진 것이다. 김경희는 2009년부터 김정일의 현지 시찰을 그림자처럼 수행했다. 한때 김정일의 장남인 정남(40)을 챙겨온 것으로 알려진 장성택은 병상의 김정일에게 ‘3남 정은을 후계자로 선택하라’고 건의했다고 알려져 있다.

김경희 조문단 뒷줄에서 앞줄로 지난 20일 조문단 뒷줄에 섰던 김경희(아래 사진 원안) 북한 당 경공업부장이 23일 조문 때 맨 앞줄(위사진 원안)로 나왔다. 순서도 조카인 김정은(앞줄 왼쪽)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으로부터 셋째다. 김정은 오른쪽으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장, 최영림 내각 총리, 김경희, 이영호 총참모장, 김영춘 인민무력부장, 김국태 당검열위원장이 섰다. 뒷줄 왼쪽에 김정은의 여동생 여정(추정)과 최태복 당 중앙위 정치국 위원이 보인다. [조선중앙TV=연합뉴스]

 장성택은 김정은이 2009년 1월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 최고인민회의 제12기 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에 선출되고 지난해 6월엔 국방위 부위원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하지만 대장 칭호는 받지 못했다. 지난해 9월 당대표자대회에서 조카 김정은, 부인 김경희, 최용해(61) 당 비서가 함께 ‘대장’ 칭호를 부여받을 때 누락됐다. 당시 김정일이 ‘빨치산 혁명 핏줄’인 김경희와 최용해에게 대장 칭호를 내림으로써 김정은 후견그룹 사이 균형을 맞추려 했다는 분석이다.

 따라서 이번 장성택 대장 칭호 부여를 놓고도 두 가지 해석이 나온다. 이미 군부에 자기 사람을 심어 놓은 장성택의 ‘수양대군식’ 권력 장악 과정이란 시각과 고모부에 대한 김정은의 배려란 시각이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김정은이 전체 권력을 실질적으로 승계한 상황에서 초기 중심적 역할을 한 장성택을 적절히 배려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며 “‘대장 장성택’에게 곧 바로 힘이 쏠린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장성택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의 개혁·개방 성향 때문이다. 그는 2002년 10월 26일 북한 경제시찰단(단장 박남기 당시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등 18명)의 일원으로 8박9일간 서울을 방문했다. 북한이 7·1 경제관리개선조치 등 개혁·개방 드라이브를 걸 때다.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었던 장성택은 삼성전자와 코엑스 몰, 지방 공장 등을 둘러보고 서울의 지하철과 노래방도 경험했다.

 당시 그를 지켜본 남한 인사들은 장성택이 한국개발연구원(KDI)에도 관심을 나타내는 등 남한 경제발전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가 신의주 행정특구와 관련해 우리 정부에 특구 책임자로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을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는 얘기도 있다. 조동호(정치학) 이화여대 교수는 “2002년 경제시찰단의 실질적 단장은 장성택이었고 그 인사들이 개혁·개방을 준비하는 모임이 아니었나 생각한다”며 “장성택은 나름대로 북한이 어떻게 가야 살아날지 아는 인물로 향후 북한이 안정되면 개혁·개방으로 나오는 추진체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성택은 2003년 7월 북한 매체에서 사라졌다. 2006년 1월 당 근로단체 및 수도건설부 제1부부장으로 복귀할 때까지 2년간 지방에 유배돼 이른바 ‘혁명화’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한기범 통일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장성택에게 힘이 지나치게 쏠리자 분파주의로 보고 김정일이 견제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서울에 왔을 때 “자본주의 문화를 맛보자”며 룸살롱에 간 것이 계기가 됐다는 얘기도 있다. 정동영 의원은 “2005년 평양에 갔을 때 장성택의 안부를 묻자 김정일은 ‘남쪽에 가서 폭탄주도 배우고 해서, 아파서 쉬게 했다’며 웃었다”고 밝힌 바 있다.

 2006년 그의 복권엔 부인 김경희의 역할이 컸다. 당시 두 사람은 성격차 등으로 별거 상태나 다름없었지만 ‘권력 유지를 위한 동맹’ 차원에서 서로 밀어준 것으로 해석됐다. 두 사람은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에서 만났다. 김일성은 김경희에 대해선 ‘딸바보’라 할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경희의 술주정도 다 받아줬다고 한다. 김경희는 한때 양주를 와인 마시듯 들이켜는 등 알코올 중독에 빠지기도 했다.

 김정일도 김경희를 챙겼다. 뇌졸중 이후 군대 경험이 없는 김경희에게 대장 칭호를 주고, 장성택을 승진시켜 본인 사망 이후 어린 아들의 후견인으로 삼았다. 김경희는 ‘김일성의 딸’로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권위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어릴 때부터 수많은 권력투쟁을 목격했기 때문에 김정은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는 것이다. 김경희는 성격이 다소 괴팍하지만 정도 많다고 한다. 김정일과 두 번째 부인 성혜림(1937~2002년) 사이에서 김정남이 출생했을 때 이 소식이 아버지 김일성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막아준 것도, 김정일이 네 번째 부인 고영희(1953~2004년)에게 빠지자 성혜림을 모스크바에 보낸 사람도 김경희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장성택·김경희 부부가 김정은 서포트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권력을 다지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고 있다.

김수정·고수석 기자

◆ 관련기사

▶ 김정남 女경호원들 열흘전쯤 한국서…
▶ 열차서 숨진 김정일, 가려고 했던 곳은?
▶ 김문수 "20대 김정은에 세계가 굽실…코미디"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