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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어느 조선화교의 소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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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우덕
중국연구소 부소장

북한과 중국의 접경 도시 단둥(丹東)에 살고 있는 저우(周·42) 사장. 그는 한국말에 능통하다. 그렇다고 조선족은 아니다. 중국 여권을 갖고 있으니 한국인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북한에서 만든 옷을 한국으로 수출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웃 신의주를 수시로 드나든다. 중국과 북한, 그리고 한국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그의 정체성은 ‘조선(북한)화교’다.

 그는 19세 때(1988년) 북한에서 나왔다. 대학 공부는 중국에서 시키겠다는 부모의 뜻에 따라 푸젠(福建)화교대학에 입학했고, 졸업 후 단둥에 터전을 잡았다. 그는 청소년 시기를 북한에서 보냈기에 북한 주민들의 심리를 잘 이해한다. 학창 시절 김일성 생일 때면 배급받던 사탕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단다. ‘김정일 위원장 사망에 오열하는 북한 주민들의 눈물이 남 일 같지 않다’고 말한다.

 저우 사장의 비즈니스 자산은 평양과 신의주에 살고 있는 화교 친척들이다. 조선화교의 유통망을 이용해 중국 생필품을 북한으로 공급하고, 광물·수산물 등을 북한에서 수입하고 있다. 돈 되는 것이라면 다 한다. 지금은 북한 공장에서 생산한 의류를 한국으로 공급하는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그의 물건은 주로 동대문에서 팔린다. 몸은 중국에, 친지와 가족은 북한에, 돈은 한국에서 버는 삶이다.

 그는 ‘중국·북한·한국 중 어느 나라에 정이 가느냐?’는 질문에 “특별히 맘 가는 곳이 없다”고 답한다. “중국은 내 집이라는 생각이 안 들고, 북한은 답답하고 가난해서 싫고, 한국은 돈 이상의 그 무엇도 기대하기 힘들다”는 얘기였다. 중국·북한·한국이 만나는 ‘회색 지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단둥과 신의주에 살고 있는 같은 처지의 화교들이 그의 유일한 친구다.

 단둥의 조선화교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대략 1000명에 달하고, 이 중 700여 명이 저우 사장처럼 북한 관련 무역업에 종사하는 것으로 현지 관계자들은 추산하고 있을 뿐이다. 숫자는 적지만 북한 경제에서 차지하는 그들의 역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화교를 통해 장마당(시장)에 공급된 물품은 북한 주민들의 생계 유지를 가능케 하는 버팀목이다. 북한 당국이 직접 무역에 나서면서 영역이 점점 좁아지고 있지만, 이들은 북한의 폐쇄 체제에 숨구멍을 뚫어줄 존재이기도 하다.

 그들에게도 김 위원장의 사망은 큰 타격이다. 가뜩이나 교역량이 줄어들고 있는 판에 장마당을 폐쇄했다는 보도가 나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저우 사장은 ‘교역이 언제 정상화될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쉰다.

 ‘연말인데, 신년 소망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중국과 북한, 한국의 ‘접경’에 사는 우리들에게 달리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내가 자유롭게 오가며 사업할 수 있도록 세 나라가 서로 잘 지내는 것 밖에요….” 저우 사장은 짙은 안개에 쌓여 있는 압록강 건너 신의주를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깊게 내뿜었다.

단둥에서

한우덕 중국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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