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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새로운 커뮤니케이션문화와 민주공동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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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 통신기술 덕택으로 서로 간의 소통 속도는 매우 빨라졌고 횟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그와 같은 새 소통 방법이 오히려 인간을 더 심한 고립과 고독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볼 때다. 정보혁명이 디지털시대를 열어가면서 아이폰, 트위터, 페이스북 등 새로운 통신수단의 출현은 개인 간의, 그리고 개인과 집단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질과 양 모든 면에서 고속팽창시켰으며 인간의 생활패턴과 인간관계의 성격을 바꿔가고 있다. 엘리베이터라는 작은 공간 안에서 너나없이 각자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데 열중하느라 서로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사라져버린 새로운 행동양식이 주변에서 정착돼가고 있다. 먼 곳의 사람과의 소통은 쉽고 간편해진 반면 바로 옆 사람의 존재에는 무심해진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문화가 이웃이나 친구들, 가족 사이의 인간관계를 메마르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걱정은 결코 새롭거나 유난한 것이 아니다. 한 세대 전 사회과학도들의 관심을 끌었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Adorno)와 호르크하이머가 같이 쓴 『계몽의 변증법』에서 이미 커뮤니케이션에 의한 고립(isolation by communication)이란 의미심장한 논제가 제시된 바 있다. 사실 정치나 경제의 역사적 전환을 밑받침하는 문명의 전환은 사회과학적 분석보다 문명사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진리는 오직 역사 속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문명의 발전, 특히 기술의 발전과 보급에 의한 인간생활의 급격한 변화를 역사가 지닌 이중성 혹은 변증법의 작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중세의 답답한 종교적 통제사회를 넘어선 계몽주의 자체가 이미 이를 파괴하는 독소를, 인간의 이성을 해방시키는 자유는 이를 무참히 묶어버리는 독재와 압박의 원초적 야만성을 잉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20세기 들어 과학문명의 꽃은 활짝 피었지만 특정 권력이나 이념집단이 통제하고 조작할 수 있는 매스커뮤니케이션은 사회의 다양성과 자유보다는 획일성과 통제를 조장할 위험이 크다는 것을 지적한 그들의 경고는 20세기 한민족이 걸어온 역사, 그리고 오늘날 남북한이 처한 어려운 상황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20세기 초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한민족이 독립운동에서 내세웠던 두 개의 독립국가 모델은 소련식 공산주의 국가와 영미식 민주주의 국가였다. 1945년 해방은 한반도에 남북분단이란 기구한 운명을 수반하였고 두 개의 상반된 모델은 현실화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항일투쟁을 최대의 업적으로 내세웠던 김일성의 북한체제가 왜 일본 제국주의 체제의 특징인 ‘신성불가침’의 왕조계승 전통과 만사에 군(軍)을 앞세우는 군국주의 이념을 모방하는 형국이 돼버렸는지는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남쪽 우리 한국이 겪고 있는 지금의 정치적 혼란은 어떻게 설명해야 설득력이 있을까.

 대한민국의 역사는 자유의 신장, 즉 민주화를 위한 지속적 노력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60여 년의 민주화과정, 특히 87년 체제가 시동한 후의 지난 20여 년을 돌이켜보면 ‘민주화의 변증법’이란 악몽이 작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을 피할 수 없다. 권위주의 체제를 타파하고 민주화를 실현시키겠다는 뜨거운 열정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안정된 제도로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필요한 민주적 규범이나 소양을 너무나 가볍게 치부해 버리는 반민주적 요소를 잉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야 국민이 스스로 선출한 국회와 정당에 대한 불신이 이렇듯 위험수위를 넘어선 대의민주주의의 파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디지털시대가 가져온 커뮤니케이션의 팽창이 과연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밑받침할 새로운 공동체 건설에 결정적으로 공헌할 수 있을까, 아니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문화가 시민의 인간적 고립과 고독을 한층 심화하고 국민을 여러 집단으로 나누어 대결케 하는 사회적·정치적 분열의 촉진제로 작용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점쳐보는 관건이 될 것이다.

 이 나라에서 바로 이 시대에 함께 살아가게 된 우리의 운명이 행운임을 받아들이는 데는 역시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의 얼굴을 맞댄 대화에서 서로를 확인하는 것이 제일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따뜻한 세모가 됐으면 좋겠다.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