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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이 ‘발 묶인 토끼’ 되지 않으려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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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이야기다. 옛 소련의 문화사절단이 북한을 방문했다. 초등학교를 찾은 사절단이 어린 학생들에게 이솝우화 ‘토끼와 거북’을 얘기해줬다. “토끼같이 게을러서는 안 되고 거북처럼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며 말을 마쳤다. 그러자 한 학생이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왜 거북 동무는 자고 있는 토끼 동무를 깨워서 같이 가지 않았습니까. 이는 사회주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 아닙니까”라고. 당시 이 말을 듣고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어떻게 다른지 알려줬던 일화였다.

자본주의는 태생이 불공정하다. 토끼든 거북이든 앞서가는 자와 뒤처지는 자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다르다. 앞서가는 자는 어떻게든 뒤처지는 자를 데리고 가는, 결과의 공정을 추구한다.

케케묵은 얘기를 꺼내는 건 요즘 화두가 공정이라서다. 진보 진영은 물론 보수도 공정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결과의 공정’까지는 아니다. 거북이 자고 있는 토끼를 깨워서 같이 가야 한다는 건 아니다. 기회 균등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광복절 때 주창한 공정사회가 그렇다. “출발과 과정에서 공평한 기회를 갖는 사회”다.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도 며칠 전 당 비대위원장 수락 연설에서 “약육강식의 정글이 아닌 공정한 시장으로 만들겠다”며 “누구나 기회 앞에 평등한 틀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공정한 시장경제 규칙을 만들어 기회균형을 추구하겠다는 의미다. 민주통합당이 강조하는 것도 경제민주화다. 경제민주화란 게 뭔가. 기득권자에게 유리하게 돼있는 시장경제의 규칙을 공정하게 재정립하는 것이다. 차기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안철수 교수도, 진보 논객 진중권씨의 해석에 따르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공정한 게임 규칙의 확보”를 주장한다.

진보든 보수든 공정 운운하는 건 양극화 심화 때문이다. 부와 빈곤의 대물림이 구조화되고 있는 이유도 있다. 경제시스템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서 공정에 대한 갈망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복지의 한계도 작용한다. 복지는 결국 ‘가진 자의 자선’이다. 이보다는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적용되는 규칙에 따라 정정당당하게 경쟁할 기회를 달라는 요구다. 그래야 양극화의 근본적 개선이 가능하단다.

문제는 이게 다가 아니라는 데 있다. 기회 균등과 공정 규칙이란 말의 파괴력은 엄청나다. 토끼와 거북의 얘기로 돌아가보자. 태어날 때부터 ‘달리기 귀재’인 토끼와 달리기라면 젬병인 거북의 경주다. 이들을 동일한 출발선상에서 똑같은 규칙으로 시합할 기회를 주면 다들 공정하다고 생각할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다. 100m 경주라면 거북을 토끼보다 90m 앞에서 출발시키는 걸 공정이라 얘기할 거다. 요컨대 토끼와 거북의 초기 조건을 똑같이 맞춰야 한다는 얘기다. 초기 조건이 판이한 상황에서의 기회 균등과 공정 규칙은 책임 회피나 변명으로 간주된다.

내년 화두가 재벌 개혁이라고 보는 이유다. 상속에 대한 반감도 거셀 거다. 내년 대선의 승자는 셋 중 하나가 분명하기에 하는 말이다. 박근혜와 안철수 그리고 민주통합당 후보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같이 기회 균등과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강조한다. 공정의 속성상 이는 ‘초기 조건의 시정’으로 나아간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경쟁은 토끼와 거북의 경주에 비유된다. 선대로부터 받은 재산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마에 흘린 땀으로 경쟁하는 걸 공정이라 생각한다. 초기 조건이 불리한 사람은 심판의 권한과 책임으로 보호해줘야 한다고 한다. 그게 공정한 심판으로서 국가가 할 책무라는 주장이 먹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재벌과 대기업, 재벌 2세들은 바짝 긴장해야 할 거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얘기는 먹히지 않을 판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우를 범한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는 얘기다. 기존 체제의 수혜자들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 초기 조건이 다른 경쟁도 경제 성장과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한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거북이 토끼를 이기는 사례도 많아져야 한다. 무엇보다 승자는 거만하지 않고, 겸손해야 한다. 두 발이 묶인 토끼가 돼서 거북과 경쟁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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