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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Global] ‘바흐 마라톤’ 연주해낸 한인 바이올리니스트 제니퍼 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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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음악의 최전선에서 생존 작곡가들의 곡을 연주해 온 바이올리니스트 제니퍼 고(35). 그가 음악의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 도전했다. 제니퍼 고는 10월 말 맨해튼 미국문예아카데미에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6곡 전곡을 연주했다. ‘바이올린의 성서’로 불리는 곡이다. 완벽한 기교와 심오한 해석, 지성과 열정을 갖춰야 연주할 수 있는 곡으로, 누구나 선망하지만 거장들조차 부담스러워한다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고씨는 반주자는 물론 악보도 없이 3시간(인터미션 30분) 마라톤으로 연주했다.

 뉴욕타임스는 고씨의 ‘바흐 마라톤’ 전후로 대서특필했다. 뉴욕타임스의 음악비평가 앤서니 토마시니는 “그녀는 연주 중 가녀린 샤콘을 심도 있게 표현적으로 해석했다”고 평했다. 고씨는 이 콘서트를 열흘 앞두고 버지니아의 애넌데일 고교에서 김윤옥 여사와 미셸 오바마 앞에서 연주했다.

박숙희 뉴욕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바흐 마라톤 연주 얘기부터 시작하자. 반주자 없이 연주했는데.

 “솔로 바흐를 연주하는 것은 정신적, 영적, 육체적으로 얼마나 집중할 수 있는가를 진짜 시험하는 것이다. 난 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연주곡 음표 하나하나가 완전하게 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파르티타 제2번은 ‘샤콘’으로 불리는 긴 악장으로 끝난다. 청중의 반응이 각별히 열광적이었다.

 “샤콘은 전 사이클의 중심이다. 연주에 몰입해 반응을 제대로 관찰할 수는 없었다. 이 부분을 말해 줘서 고맙다!”

●바흐 솔로곡은 ‘기도문’처럼 알려져 있다. 종교적으로 음악에 접근했나.

 “바흐의 바이올린 전곡은 기도책과 같다. 음악에 전 생애가 요약돼 있다는 느낌도 있다. 연주를 하고 나면 전 생애를 살아낸 듯한 감정이 복받친다. 인간성을 받아들이면서도 초월성을 찾으려 고군분투하고, 삶에서 환희를 발견하는, 무척 인간적인 여정이 절절하게 와 닿는다.”

●음반 발매 계획은.

 “바흐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녹음해 현대음악과 함께 담아 출시할 예정이다.”

●존 애덤스, 루 해리슨, 제니퍼 히그돈, 엘리엇 카터, 존 조언, 그리고 필립 글래스까지 주로 생존해 있는 현대 작곡가들의 신곡을 연주해 왔는데 바흐 마라톤은 의외였다.

 “음악이란 호흡하는 유기체와 같다. 연주자들은 누구나 훌륭한 곡을 연주하고 싶어 한다. 난 300여 년 전에 쓰인 바흐의 음악에 완벽한 감동을 받지만, 우리 시대에 만들어진 곡이 예외가 될 순 없다. 뮤지션으로 산다는 것의 가장 큰 매력은 나 자신이 음악의 일부가 될 때까지 음악 속에 완전하게 빠져들고, 나와 음악이 하나가 되도록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한·미 영부인과 랑데부

 제니포 고는 10월 13일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의 다민족학교 애넌데일 고교에서 한·미 양국의 퍼스트레이디가 지켜보는 가운데 외젠 이자이(Eugene Ysaye)의 곡을 연주했다. 이날 미셸 오바마는 제니퍼 고의 삶을 ‘완벽한 예’로 들었다. “제니퍼는 어렸을 때 부모가 안 시켜본 것이 없었다. 좋아하는 것이 바이올린이라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 탐험했다. 오랜 시간 동안 연습을 하며 이제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중 하나가 됐다”고 말했다.

●김윤옥 여사와 미셸 오바마 여사 앞에서 연주했는데.

 “영광이다. 미셸 오바마 여사가 내 삶에 대한 연설을 해서 정말 황홀했다!”

●지난 3월 LA의 월트디즈니 콘서트홀에서 마크 그레이 작곡의 ‘무궁화(Mugunghwa: Rose of Sharon)’를 세계 초연했다. 어떤 곡인가.

 “‘무궁화’는 한국전쟁 때 이산가족이 된 한 엔지니어 김남수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인 곡이다. 북한에 가족을 두고 월남한 그는 미국에 온 후 평생 가족을 그리며 살았고 2003년 세상을 떠났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낸 시(詩)를 남기고. ‘무궁화’는 우리 부모 세대 모두의 경험에 관한 것이자, 나 같은 2세들에게 그들의 여정을 들려주는 곡이다.”

●마크 그레이와 작업하게 된 경위는.

 “작곡가 존 애덤스(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중국의 닉슨’ 작곡)를 통해 마크를 만났다. 우연히 ‘무궁화’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후에 마크가 보내준 악보와 레코드를 들으니 매우 인상적이었다. 38선 이북 황해도 청단에서 태어나신 엄마는 내 삶을 지탱해 준 힘이다. 코리안아메리칸으로서 나 자신의 유산을 탐구하고 싶었다.”

●당신에게 ‘한국’이란.

 “나 자신이다. 우리 부모님이 극심한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셨다면, 나도 이 자리에 없을 것이다. 엄마는 어렸을 때 할머니와 쌀 한 줌을 얻기 위해 구걸했다고 한다. 이후 주머니에 30달러를 갖고 미국에 유학 와 박사학위를 받은 후 교수가 되셨다. 음악가를 만드는 데 3대가 걸린다는 말이 있다. 1세대는 가난에서 빠져나와야 하고, 2세대는 교육해야 한다. 그런 후 3세대에 가서야 음악가가 나올 수 있다고 한다. 엄마는 2세대인 내가 뮤지션이 될 수 있도록 해주셨다.”

바이올린과 문학은 가깝다

●우연히 바이올린을 시작했다는데.

 “어릴 때 스케이팅, 체조, 수영, 다이빙, 그리고 발레까지 안 해본 게 없다. 그러고 나서 동네 음악학원에 갔더니, 피아노· 첼로를 배우려면 기다려야 했고, 바이올린에만 자리가 있었다.”

●돌이켜볼 때, 콩쿠르는 경력에서 얼마나 중요한가.

 “뮤지션을 위한 경쟁제도에 대해 약간 양면적인 입장이다. 음악이란 독특한 개인적인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좋다 나쁘다를 가려내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콩쿠르는 음악 전공자가 아닌 나와 같은 이들에게 기회를 주기도 한다. 난 차이콥스키 콩쿠르 덕분에 훌륭한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기회가 주어졌고, 그게 내 음악 경력의 시작이 됐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는데.

 “내게 문학과 음악은 여과지처럼 나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수단이다.”

●좋아하는 작가는.

 “최근 오르한 파무크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제발트(W. G. Sebald)도 좋다.”

제니퍼 고

시카고 인근 글렌엘린에서 태어나 오벌린칼리지 영문과와 커티스 음대를 졸업했다. 11세에 시카고심포니와 ‘파가니니 콘체르토’를 협연하며 데뷔했으며, 1994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러시아 출신 아나스타샤 체보타레바와 금메달 없는 공동 은메달을 수상했다. 2009년 피아니스트 레이코 우치다와 녹음한 ‘스트링 포에틱(String Poetic)’으로 그래미상 최우수 체임버연주 부문 후보에 올랐다. 피아니스트 벤자민 호크만과 결혼, 종종 함께 연주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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