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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영국 전통 연기파 배우 알렉 기네스

중앙일보

입력

"언젠가 레스토랑에 간 적이 있다. 현관에 들어서면서 모자와 코트를 내밀고는 번호표를 달라고 했더니 직원이 미소를 띠며 '필요없어요' 라며 그냥 들어가라고 했다. '야, 나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구나' 라며 흡족한 마음으로 식사를 마쳤다. 그런데 식당을 나와 코트 주머니를 뒤지다 종이 쪽지를 발견했다. 거기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대머리에 안경을 썼음' ."

영국 배우 알렉 기네스. 로렌스 올리비에.존 길거드.랠프 리처더슨 등 영국 전통 연기파 세대의 마지막 인물이었던 그가 지난 5일밤(현지시간)세상을 떠났다. 86세.

잉글랜드 남부에 위치한 킹 에드워드 7세 병원측은 구체적인 사망 원인을 밝히지는 않았다. 주변에서는 그가 최근 백내장으로 고생했으며 이로 인해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66년간 연극 무대와 스크린을 누빈 그였지만 연기 인생의 길이에 상응할 만큼의 대중적인 인지도는 얻지 못했다. 앞에 든 일화는 그가 스스로 털어놓은 이야기다.

그는 이 말에 이어 "만약 내가 수퍼스타가 되겠다고 용을 썼다면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단지 배우로서 너무 행복하다" 며 소탈하게 말했다.

그의 희망처럼 비록 대중 스타는 아니었지만 연기자로서 그가 지녔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극작가 로널드 하우드는 "그의 연기를 볼 때마다 이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 신비한 느낌에 젖었다"고 회고했다.

1980년 미국 아카데미가 "기억에 남을 만한 수많은 작품과 놀라운 연기를 통해 영화 연기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 며 공로상을 수여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연기 인생이 길었던 만큼 중장년 독자들에겐 아마도 그에게 아카데미 주연상을 안긴〈콰이강의 다리〉(57년)에서의 니콜슨 대령으로, 20.30대에겐〈스타 워즈〉에서 제다이 기사인 오비완 케노비로 기억될 것이다.

1914년 4월 2일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일찌기 배우의 꿈을 키웠지만 쉽게 기회를 얻지 못해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한동안 일했다. 그러던 중 셰익스피어극 배우로 유명한 존 길거드를 만나 20살때 처음으로 무대에 섰다.

40년대와 50년대엔 고전 코미디 연극에 주로 출연하다 〈콰이강의 다리〉이후 데이비드 린 감독의 작품에 다수 출연했다.

비록 주연은 아니었지만 〈위대한 유산〉〈아라비아의 로렌스〉〈올리버 트위스트〉〈닥터 지바고〉〈인도로 가는 길〉등 린 감독의 대표작들에서 그는 영화의 향기를 돋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정서가 불안한 어머니와 포악한 계부 밑에서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낸 그는 평생 친아버지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언젠가 "천국이란 한 여름 저녁 테라스에 앉아 절친한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며 침묵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지 않을까" 라고 말했던 알렉 기네스. 그는 지금쯤 친구보다 먼저 친부(親父)를 만나 뜨겁게 포옹하고 있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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