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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의 ‘마음아 아프지마’] 잔소리 반대말은 ‘우산’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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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소화가 잘되지 않을 때, 탄산음료를 먹으면 도움이 될까?’ JTBC의 ‘닥터의 승부’(매주 금요일 오후 10시50분)란 신설 의료정보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받은 질문이다. 이 프로에서는 소비자들이 질문을 던지고 16명의 의사가 거꾸로 고민하고 싸우며 정보를 제공한다. 이 프로의 출연 요청을 받고 처음엔 망설였다. 과거 출연했던 다른 방송에서는 혼자 나가 점잖게 ‘박사님’ 호칭 받으며 정답을 이야기하면 됐는데…. 그러나 의사와 의료 소비자 간 감성적 의사 소통의 문제가 역전되는 모양새가 흥미로웠다.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16명의 전문의 중 4명만이 도움이 된다고 했다. 난 4명 중의 한 명이었다.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위약 효과)’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플라시보 효과는 약리학적 활성이 없는 약물을 약이라 믿게 하고 주었을 때 환자에게 유익한 효과가 나타나는 경우를 이야기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3 명 중 1명은 효과를 본다는 통계도 있으니 무시할 수 없는 현상이다. 신약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연구하는 데 있어 플라시보 효과가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정이 될 정도다.

 그러나 명의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플라시보 효과에 대한 평가는 달라진다. 요즘처럼 의학이 표준화되고 지식이 거의 실시간으로 모두에게 접근 가능한 상황에서 특별한 비방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힘들다. 같은 약을 쓰고도 더 효과를 끌어내는 것, 즉 플라시보 효과를 극대화하는 의사가 명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효과를 내는 데 핵심 역할을 하는 게 자기 자신과 상대방에 대한 믿음과 신뢰다.

 ‘선생님 이 약 먹으면 바보 되지 않나요?’ 정신과 약물에 대한 오해로 진료 시간마다 수도 없이 환자들에게 듣는 질문이다. 믿을 만한지 다시 한번 확인해보자는 것인데, 이런 태도는 스트레스 증상을 줄여주지도 못하면서 투여되는 약물의 양을 늘리고 치료 기간도 길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아이러니하게 의사 처방대로 ‘평생 보약이라고 생각하고 먹겠습니다’ 하는 분들이 더 금방 약을 끓게 된다. 중독성이 없는 약물에도 중독될까 봐 매번 먹을지 말지를 고민하고 매일 스스로 양을 줄였다 늘렸다 조정하는 분들이 오히려 약을 끊지 못하니 매번 의심하고 확인하는 태도라는 것이 심리적 괴로움을 해결하는 데는 안티 플라시보 효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반복적인 확인’. 복잡해진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삶의 실수를 줄이기 위해 현대인들이 터득한 기술이다. 일에 집중하는 스타일, 인생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자신이 축적한 강력한 데이터베이스를 믿고 반복 확인 행동을 늘려간다. 문제는 반복 확인의 부정적인 면, 즉 그 바닥에 깔린 불신의 심리다. 불신이 상대방에게 향할 때 저항이 생기고 반복 확인은 잔소리가 된다.

 20대 후반 미혼 남성이 스트레스 클리닉을 방문했다. 자수성가해서 회사를 키운 부친을 대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확인하고 야단치니 자신을 믿지 않고 무시한다는 느낌이 들어 괴롭다고 했다. 잔소리 때문에 미치겠다는 것이었다. 한창 일하고 놀 나이인데 건장하고 잘생긴 청년이 연애도 싫고 일도 싫다며 심각한 심리적 회피 증상을 호소했다. 아버지 얼굴만 봐도 불안하고 기분이 좋지 않아 보지 않으려고 도망쳐 다니니, 그만둘 수도 없는 본인 회사의 오너이자 같이 사는 집의 부친이 스트레스 대상이니 너무 괴롭다고 했다. 듣다 보니 그 부친도 이미 내 클리닉의 고객이었다. 부친은 아들이 자신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고 좋은 경영자가 되길 바라는데 자식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괴로움을 호소한다.

 한 정신분석학자의 수퍼맨, 스파이더맨, 그리고 배트맨의 차이점 설명이 재미있다. 수퍼맨은 태어날 때부터, 스파이더맨은 우연히 후천적으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큰 능력을 갖다 보니 일반인으로 살고 싶다는 고민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반해 배트맨은 복수를 위해 자신의 의지로 키운 능력이기에 고민이 없다. 명확한 자기 정체성을 가졌다고 할까. 성장을 위한 기본적 시행착오를 점프시킬 방법은 없는 듯하다.

 부모와 자식, 상사와 부하직원 그리고 의사와 환자 관계는 혈통, 조직, 지식 등 내용은 다르나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관계라는 점에서 잔소리에 면죄부가 주어져 있다. 부모 자식 관계에서는 더하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그 걱정과 불안을 ‘반복 확인’ 즉 잔소리로 다시 자녀에게 쏟아내면 자녀는 자신의 걱정에 부모의 걱정, 불안까지 이중고(二重苦)를 겪게 된다. 차이는 있으나 나머지 두 관계도 유사하다.

 잔소리의 심리적 반대말은 ‘우산’이다. 잔소리에 대한 충동을 참아내고 내 자식, 내 부하직원의 성장통을 묵묵히 지켜보며 쏟아지는 불안 소나기를 막아주는 그런 우산이 되어주어야 한다. 그 우산 아래서 서로 믿음과 신뢰가 쌓여야 합리성을 넘어서는 플라시보 효과가 일어나게 된다. 진짜 좋은 부모, 좋은 상관, 그리고 명의가 되는 방법이다. 기다림이 사랑인 것이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dhyoon@snuh.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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