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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K2] 히말라야 14봉 완등한 날

중앙일보

입력

“아버님,드디어 해냈습니다.”
히말라야 8천m 고봉 14좌를 완등한 ‘작은 탱크’ 엄대장의 눈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5척 단신의 자그마한 체구로 8천m 봉우리를 하나하나 밟아온 지 어언 12년.그동안 수많은 위기를 만났고 사랑하던 산친구도 잃었지만 굽히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크레바스를 건너고 세락을 넘으며 마지막 8천m에 올랐다.

밤이 가고 아침이 찾아온다고 시간이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은 아니다.정상을 등정한 31일이 엄홍길 등반대장에게는 생애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였다.

서산에 음력 2일달이 희미하게 걸쳐 있는 밤 4시(한국시간,파키스탄시간 자정).송곳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며 은하수는 남북으로 길게 강을 이루고 있었다.

31일 오전 2시 30분에 일어난 대원들은 이른 아침식사를 하고 수통에 물을 담은 후 캠프Ⅳ를 뒤로 했다.눈은 밤새 얇게 얼어 크러스트를 이루고 있어 걷기가 편했다.대원들의 랜턴 불빛은 어둠속에서 반딧불처럼 너울너울 춤을 췄다.

‘사각 사각’
앞서 가는 대원의 발걸음 소리가 적막을 깼다.어둠을 헤치고 넓은 설원을 2시간 정도 걸으니 K2 정상부를 이루는 ‘서미트 돔(Summit Dome)’에 도착했다.이곳은 멀리서 보면 옆으로 퍼진듯이 보이지만 가까이 가 보니 급경사 암벽에 눈과 얼음이 달라붙어 오르기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돔하단부 부터 경사가 급해지고 오른편으로 거대한 세락(눈처마)이 호위병처럼 도열해 있다.‘병목 구간’을 오르면서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된다.비록 산소를 마시면서 등반하지만 숨이 차는 것은 마찬가지다.나이가 많은 유한규 원정대장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 같다.

가파른 암벽 사이사이에 눈과 얼음이 붙어있는 설빙 구간을 어느 정도 가로지르니 설사면이 앞을 가로막았다.이 지점은 추락 위험이 가장 높은 곳으로 모두에게 주의를 줬다.멀리 브로드 피크 넘어로 아침 해가 머리를 내민다.주위가 밝아오면서 추위가 조금씩 사라진다.암벽 상단부에 올라서니 생각했던 것보다 눈이 많지 않고 크러스트가 잘 돼 있어 다행이었다.그러나 정상은 아직도 까마득하기만 하다.

설사면을 따라 계속 오르니 점점 뚜렷해지는 능선이 정상으로 이어졌다.의외로 유대장과 박무택 대원이 힘이 넘쳐 보이는 데 비해 한왕룡 대원은 호흡조절기가 고장이 났는지 자꾸 쳐진다.전위봉에 도착하니 가까이서 주봉이 손짓한다.그러나 설사면을 따라 언덕을 몇차례 넘어도 주봉이 나타나질 않는다.

‘얼마나 더 가야 정상이 나타나나’

조바심이 더해진다.티벳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난다.1시간30분 정도를 걸었다.드디어 넓고 평평하며 가운데에 아이스 바일이 꽂혀있는 정상에 닿았다.12년의 긴 여행이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머리속으로는 히말라야 원정에서 겪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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