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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권장오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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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중국 성도(成都) 출신의 양웅(揚雄·서기전 53~18)은 ‘해조(解嘲)’라는 글에서 “아침에 권력을 잡으면 재상이 되지만/저녁에 권세를 잃으면 필부가 된다(旦握權則爲卿相/夕失勢則爲匹夫)”고 말했다. 조선 왕조 참여를 거부했던 목은 이색(李穡)은 ‘군자의 지킴(君子守)’이란 시에서 “아침에 재상 권력 잡았어도/한번 기울면 재앙이 미친다(當朝秉鈞衡/一傾災禍延)”고 더 강하게 권력무상을 노래했다. 왕조 교체기를 살아야 했던 경험의 산물이리라.

 조선 중종 때 수찬 민세량(閔世良)이 혼인집에서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의 집에 출입하던 한 벼슬아치를 보았다. 그는 햇볕이 내리쪼이는 것을 빙자해 자리 아래로 피하면서 “당양(當陽)이라 일컬을 수 있군”이라고 말했다. 양(陽)은 해(日)와 같은 뜻으로, 천자가 남쪽을 바라보고 앉아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당양이라고 한다. 권신 김안로에게 붙어 권세를 누리는 것을 풍자한 것인데, 이 말이 김안로의 귀에 들어가 곽산(郭山)으로 귀양 갔다. 그러나 김안로는 얼마 후인 중종 32년(1537) 절도로 유배 갔다가 사약을 마신 반면 민세량은 승지로 복귀했다.

 오릉(五陵)은 중국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을 비롯해 다섯 황제의 무덤인데, 때로는 권력무상의 뜻으로 사용된다. 당나라 시선(詩仙) 이백(李白)은 “오릉의 소나무, 잣나무는 사람을 슬프게 하네(五陵松栢使人哀)”라고 노래했다. 그보다 한 세기 뒤의 시인인 두목(杜牧)은 “한나라 왕실은 무슨 사업 벌였나/오릉에는 나무도 없고 가을바람만 부누나(看取漢家何事業/五陵無樹起秋風)”라고 왕업의 쓸쓸함을 읊었다. 그 백 년 사이 안록산(安祿山) 난 등으로 오릉의 송백마저 사라진 것인지 모르겠다.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했던 생육신 김시습(金時習)의 시구에도 “오릉에 주인은 없고 풀만 우거졌네(五陵無主草)”라는 구절이 있다. 앞서 인용한 이색의 시에 “군자는 지킴이 가장 크다/지키지 못하면 몸을 보전 못한다(君子守爲大/身非守不全)”라는 구절도 있다. 이른바 권력 실세들이 줄줄이 철창으로 향하고 있다.

 예전에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십 년 이상 못 간다고 말했지만 요즘은 ‘권장오년(權長五年)’이라고 길어야 오 년으로 바꿔야 할 것 같다. 저잣거리의 식자(識者)들은 몇 년 전부터 예견했던 모습들인데 본인들은 몰랐으니 권력에 눈이 멀면 눈뜬장님이 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쁜 역사가 또 반복한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