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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 사냥의 딜레마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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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호 29면

유럽은 숲의 땅이다. 근대 이전에는 숲이 더 울창했다. 대서양 난류의 영향으로 따뜻하고 강우량이 많은 기후가 그런 숲을 만들었다. 숲 속의 마녀나 사냥꾼 전설이 유럽 곳곳에 많고, 유럽인이 곧잘 숲 속의 비유로 세상사를 논하는 이유다. 18세기 사상가 장 자크 루소의 ‘사슴 사냥(stag hunt)의 딜레마’도 그런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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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들로선 각자 토끼를 한 마리씩 잡는 것보다 힘을 합쳐 큰 사슴 한 마리를 잡는 게 낫다. 사슴 사냥은 각자의 위치를 잘 지켜야 성공한다. 그런데 토끼 한 마리가 휙 지나가자 어떤 한 사람이 주저 없이 그 토끼를 추격한다. 마침내 혼자 토끼를 잡는다. 기분이 좋은 그는 자기 탓에 사슴을 놓친 동료 사냥꾼의 낭패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루소는 경쟁하는 국가 관계를 사슴 사냥에 비유했다. 전쟁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국가연합(Confederation)이지만 이게 각국의 이기심 탓에 쉽지 않다는 걸 간파했다. 루소는 국가연합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국가연합의 힘이 개별 국가의 힘보다 월등히 강해야 하고, 국가연합 공통의 법을 어기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전 세계가 주시하는 유럽의 재정위기나 경제위기의 해법이란 것도 이런 사슴 사냥의 딜레마에 처해 있다.

프랑스와 독일 등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유럽 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Europe)’으로 가는 코스를 밟아 가자고 한다. 바로 재정 통합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3% 이하로 묶인 재정적자 기준을 위반한 국가가 나타나면 자동 제재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유럽연합(EU) 27개국 가운데 영국·헝가리·체코·스웨덴 등 4개국은 조심스러워 한다. 특히 영국은 토끼라도 본 듯 행동한다. 배경에는 주권국가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거북하다는 국민 정서가 있다.

역사적으로 유럽 대륙과 영국 사이를 가로지르는 거리감은 도버해협(35㎞) 이상이었다. 1960년대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영국이 EU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 했다. 섬과 바다의 나라 영국은 어느 모로 보나 유럽 대륙의 나라들과는 크게 다르다는 이유였다. 프랑스는 처음부터 사슴 사냥 클럽에 영국을 끼워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주 재정적자 통제를 위한 새로운 ‘정부 간 합의’에 참여하겠다고 밝힌 EU 회원국 중에도 속사정이 복잡한 나라가 적지 않다.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도 유로화 대신 옛 자국 통화를 쓰자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으니 말이다.

유럽 통합론에는 한 분야의 통합이 물 넘치듯 다른 분야의 통합으로 이어진다는 기능주의가 깔려 있다. 유럽 통합은 사슴 사냥을 함께하며 신뢰를 쌓고, 역사적 경험과 지혜를 결집한 과정이었다. 그 덕에 유럽은 가장 오랜 세월 전쟁이 없는 평화시대를 구가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위기가 닥친 뒤 개별 국가의 이기심이 발동하고 있다. 이번 영국의 ‘고립’ 선택. 사슴 사냥을 그만둘 정도는 아니겠지만 EU에는 분명 새로운 국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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