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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벼루와 두 일본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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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서승욱
도쿄 특파원

얼마 전 ‘안중근 벼루’를 보기 위해 지방 출장을 다녀왔다. 도쿄역에서 신칸센을 타고 북동쪽으로 두 시간을 달린 뒤, 택시로 십여 분을 더 가야 나오는 미야기(宮城)현 구리하라(栗原)시의 사찰 다이린지(大林寺)다. 시골 사찰을 지키는 사람은 76세의 사이토 다이켄(齎藤泰彦) 주지와 여든이 넘은 그의 누나, 단 둘이었다. 안 의사가 1910년 만주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기 직전까지 썼다는 벼루가 그곳에 있다. 막상 도착해 보니 벼루뿐이 아니었다. 위패에다 기념비까지, 사찰은 작은 안중근 기념관이었다.

 뤼순 감옥의 간수였던 일본 헌병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의 고향이 부근이다. 안 의사의 인격에 감화된 지바는 고향으로 돌아와 안 의사의 유묵과 위패 등을 평생 집에서 모셨고, 그가 숨진 뒤엔 다이켄 주지가 그를 대신해 안 의사를 추모하고 있다.

 다이린지 방문 목적은 단 한 가지였다. 일본 정부가 벼루를 북한에 넘기려 한다는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비밀리에 진행했던 북한과의 납치자 문제 협상이 벽에 부닥치자 일본 정부가 벼루를 지렛대로 활용하려 한다는, 믿고 싶지 않은 얘기였다. 줄담배를 피우며 심각한 표정을 짓던 사이토 스님은 그러나 “맞는 이야기다. 벼루를 북한에 반환하자고 요청한 정부와 정치권 인사가 있었다”고 소문을 사실로 확인해 줬다. 일본 정부의 발상에 어이가 없었지만, 다음에 이어진 스님의 얘기가 더 가슴을 쿡쿡 찔렀다. “정작 한국의 책임 있는 사람들은 (벼루를 돌려달라는) 이야기를 간곡하게 하지 않더라. 이 벼루는 한국의 혼과 같은 것인데, 나에게 돌려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은 대사관이나 문화원의 막내들, 그것도 이야기를 하는 둥 마는 둥 한다….” 기자의 말문이 콱 막혔고, 도쿄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다이린지에 벼루를 기증한 원소유자를 찾아 나섰다. 도쿄 이케부쿠로(池袋)에서 치과를 운영하는 히로세 다메히토(廣瀨爲人·74)다. 그는 3년 전 지인에게서 벼루를 구했고, 같은 해 벼루를 다이린지에 기증했다.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했던 그는 기자를 보자마자 억눌렀던 불만을 폭발시켰다. “원래는 2008년 일본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에게 벼루를 돌려주려고 했다. 일본에서 제일 유명한 감정가로부터 감정을 받았고, 서울에서 온 전문가도 진품임을 확인했지만 정작 한국 정부는 계속 의심하면서 미적대고 있다. 안 의사의 혼이 들어간 벼루인데 한국 정부 사람들은 그냥 보통 물건처럼 대하더라….”

 히로세는 한국 정부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않으며 “그래서 안 의사와 지바 간수의 우정이 살아 숨쉬는 다이린지에 벼루를 기증했다”고 말했다.

 안중근 벼루를 취재했던 일주일 남짓, 일본에선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다녔다.

서승욱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