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모국에 대한 그리움이 벤처 열매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한 과학자의 모국에 대한 반평생 그리움이 벤처 열매로-.

하천·댐·저수지의 수위측정기계를 생산하는 창민테크(대표 남상용·44)가 주인공이다. 남모를 풍상을 겪은 러시아 한인(韓人)출신 과학자와 남한의 젊은 벤처기업가의 운명적 만남이 만들어낸 성공작이기때문이다.

창민테크는 물, 기름, 가스 등이 흘러가는 양·속도·깊이를 측정하는 최첨단 계측기를 만드는 회사. 7년간 1백억원 이상의 기술투자를 했고 세계 특허 30여개를 가질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는 회사다.

지난 11일 이 회사는 액면가 5백원 기준 1만8천원의 괜찮은 가격으로 코스닥에 등록됐다. 남상용 사장을 비롯 창민테크 60여명의 전임직원에게는 감격스런 날이었다. 이들 외에 이날 남다른 감회를 갖고 감격스러워하는 또 한 인물이 있었다. 창민테크의 기술고문 직함을 갖고 있는 장학수씨(68)가 그 주인공으로 북한과 舊소련에서 42년간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한인 과학자 출신이다.

1932년 서울에서 출생한 장학수 고문은 48년 경복중 2학년을 마친 후 공산주의를 동경, 단신으로 38선을 넘어 월북했다. 독립투사 가정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당시 일부 스승과 학자들, 문인들이 ‘붉은 공산주의 사회만이 정의롭고 골고루 잘사는 이상사회’라고 외치는 소리에 현혹되어 월북을 단행한 것.

월북 후 강계중학 3학년에 입학한 장고문은 무선 모형조정선을 만들어 천재과학소년으로 주목받아 일찌감치 소련 유학생으로 선발됐다. 50년 6·25동란 직후 소련 유학길에 나선 그는 레닌그라드 전기통신대학 무선공학부에 입학했다. 당초 그는 관심있던 물리학 전공을 원했지만 무선공학부에 억지로 배치받았고 그곳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56년 동교(同校)를 졸업한 그는 곧바로 귀국해 평양 체신성 중앙과학연구소에 일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사춘기 때부터 동경해 오던 공산주의 체제에 환멸을 느낀 장고문은 가족을 소련으로 미리 보내놓고 61년 8월 동료 2명과 함께 무려 3시간 동안 두만강을 헤엄쳐 소련으로 망명 하게 된다.

66년 소련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소련 토지개량·수리자동화 과학연구소 연구원, 레닌그라드 수문연구소 연구부장 등을 지내면서 소련에서 ‘하천유량 수위측정’ 분야에서 제1인자 소리를 듣게 된다.

월북 후 한시도 고국을 잊지 못하던 장고문은 42년 만인 지난 90년 한국땅을 밟게 된다. 김진형 과기처장관 때 만들어진 한·소 과학협력회의에 러시아측 기술자문관으로 한국에 오게 된 것.

장고문은 90년부터 93년까지 한국과학기술원(KIST) 한·소 과학협력센터 고문으로 근무했다. 창민테크의 남상용 사장과 장고문이 만난것은 93년 11월. 남사장은 원래 무역업을 했다. 88년 창민무역을 설립했으나 4∼5년간 자기제품없이 무역업을 했다. 그러다 우연히 WTO회의에 참석하고 온 친구로부터 앞으론 기술없이는 생존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것이 자극제가 돼 92년부터 사업전환을 시작했다.

신기술에 대해 남다른 관심이 있던 남사장은 93년 ‘하천유량 수위측정 분야’의 세계적인 기술자였던 장박사를 만나 같이 일할 것을 권유했다. 장고문은 한국에서 생활하며 하는 일이란 통역과 번역이 고작이었다. 물관리분야에서 세계적 기술을 갖고 있던 장고문에겐 다소 따분한 일이었다. 고국 산업발전을 위해 뭔가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게 없을까 고민하던 장고문 앞에 남사장이 나타난 것이다.

가족과 함께 고국에 정착하고 싶었고 자신의 독보적인 기술을 한국벤처기업에서 꽃피우고 싶어 했던 장박사는 흔쾌히 남사장의 제의를 받아 들여 러시아에 있던 가족을 불러들였다. 세계 최고 기술자를 얻은 창민테크는 분당에 이들을 위한 집도 마련해 주는 등 극진한 예우를 했다.

이때부터 장박사와 40여명의 직원이 하나로 뭉쳐 7년간의 길고 긴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수많은 실험과 실패속에서 나름대로 데이터와 노하우를 축적했다. 이것은 경쟁기업들이 노력한다고 해서 쉽게 따라올 수 없는 귀중한 노하우였다. 당초 3년 만에 끝내려던 기술개발은 예상외로 더 걸렸다. 천신만고 끝에 개발을 끝냈지만 생산과 마케팅문제가 막막했다. 여기저기서 자금을 구해 제품을 만들었지만 이번엔 판로가 만만치 않았다.

남사장은 이때를 “기술도 중요하지만 기술보다 생산이, 생산보다 마케팅이 더 어렵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술회한다. 계획차질로 인해 그동안 겪은 자금난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벤처 사업하려는 후배들에게 남사장은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해 주고 싶어 한다.

첫째는 목숨을 걸고 사업하라는 것, 둘째는 욕심을 줄이고 적기에 투자자금을 유치해 기술개발기간을 최대한 단축하라는 것, 셋째는 마음을 비우고 기술개발에 매진할 것을 권한다.

창민테크는 장박사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초음파 다회선 유량계, 고정밀 수위계 등 수위 및 유량관련 다양한 틈새제품을 개발, 신기술 및 조달청 우수제품 인증을 받았다. 초음파 유량계는 유체(물, 기름, 가스)의 양을 실시간으로 측정하거나 제어해 이를 원격지로 보내는 제품이다. 고정밀 수위계는 하천 댐 저수지 등의 수위를 측정하는 장비다.

러시아 기술로 잉태된 이들 제품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경쟁 우위를 확보하면서 러시아·시리아·중국 등지로 활발히 수출되고 있다. 창민테크는 수출이 활기를 띠면서 중국·베트남에 이어 미국에 지사설립을 추진중이다. 또한 캐나다에 부설 연구소 설립을 검토중이다. 장고문과 그의 가족들(장고문 장남이 캐나다에 유학중)을 위한 또 다른 배려인 셈이다.

장고문은 소련 유학시절 5살 연상인 소련 여성 아샤와 결혼, 아들 셋을 두고 있다. 장고문은 자신의 기술로 키운 벤처기업 창민테크가 코스닥에 등록되고 국내외 주문이 밀려오자 안도의 한숨을 쉰다. 항상 고국에 빚진 것 같은 느낌으로 살아왔기에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장고문은 러시아에는 아직도 우리 기업이 활용할 첨단기술이 많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기업인들에 대한 따끔한 충고도 잊지 않는다.

“한국기업들은 대기업, 중소기업 가릴 것 없이 너무 성급하다. 사업차 러시아를 방문, 관심 분야 전문가들과 만나는 것 까지는 좋은데 그들과 만나면 당장 사업화로 연결시킬 수 있는 아이템만을 원한다. 한마디로 완성된 기술만을 원하는 것이다. 완성된 기술을 주지 않으면 귀국 후에도 러시아측에 아무런 답변을 해 주지 않아 결국 한국 기업은 신용이 없다는 소리를 자주 듣게 만든다. 그러나 러시아가 갖고 있는 기술은 기초(소재)기술이 대부분이다. 그 기술에다 한국의 강점을 접목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기술개발에 매진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장고문은 91년 한국에서 ‘붉은별 아래 청춘을 묻고’라는 자서전을 낸 적이 있다. 舊소련에 살면서 장고문은 자신을 낳아 준 땅,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국을 잊지 못하고 기회만 있으면 고국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몇몇 요로를 통해 영구 귀국이 어려우면 일시 귀국의 길이라도 터주기를 간청하는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 90년 겨울 레닌그라드에서 우연히 만난 문학사상사 임홍빈 회장과 만나 밤새 자신의 인생역정 얘기를 하게 되었고 마침내 임회장이 장고문의 자서전 출판길을 터 주게 된 것이다.

자서전 머리글은 장고문의 경복중학교 스승인 이한빈 前부총리가 써 주었다. 이 전부총리는 추천사에서 “망국의 한에서 시작하여 분단의 한까지 겹쳐 그처럼 파란만장의 비극적인 주인공으로 냉전의 역사를 몸으로 점철해 온 사람”이라고 장고문을 소개했다. 이 전부총리는 말미에 “장고문이 소원대로 조국에 봉사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고 했는데 결국 장고문은 자신이 평생 배운 기술로 한국의 한 벤처기업을 키워 결실을 맺게 하면서 그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