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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추억의 그라운드 3. - 최동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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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린 야구팬들의 우상은 박찬호다. 하지만 30전후의 세대가 초등학교를 다닐 땐 최동원이 그 자리에 있었다. ‘대한민국 에이스’의 자리를 이선희에게 받아 선동열에게 넘긴 최동원! 그의 야구인생은 정말 화제의 연속이었다. 지금까지도 파란만장했고, 앞으로도 수많은 변화를 예고하는 '황금팔' 최동원을 뒤돌아보며 한국야구사에서 그가 지니는 의미를 되새겨본다.

1. 최동원의 출생

1958년 5월 24일 최윤식씨와 김정자씨 사이에서 태어난 최동원의 고향은 향도부산. 바다바람을 접하며 생활한 그의 어린 시절은 근성 있는 아이였다. 머리회전이 비상하고 이것저것 닥치는 데로 눈앞에 보이는 것을 해보기를 좋아하는 실험정신이 투철한 학생이기도 했다.

유명한 그의 부친 최윤식씨는 축구선수 경험이 있다. 최동원이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축구화를 신은 건 아버지의 영향 탓도 있지만 워낙 축구가 접하기 쉬운 때문이었다.

최동원은 5학년 때 야구로 종목전환을 한다. 하지만 그때까지 했던 여러 운동(특히 축구)이 훗날 야구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야구선수, 특히 투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러닝을 많이 할 수 있었던 까닭이었다.

2. 경남고의 신화 최동원

최동원의 아마추어 시절 피칭을 직접 본 사람들은 그의 공격적인 피칭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초구와 2구를 스트라이크로 명중시키는 건 기본사항이었다. 더구나 총알 같은 직구는 타자들이 넋을 잃고 쳐다 봐야할 정도였다. 가끔씩 구사하는 슬로커브는 100킬로를 넘지 못했으니 타자입장에선 보고 당하는 격이었다.

최동원의 이런 투구는 경남고 시절부터 정평이 나있었다. 그가 전국적 스타로 자리잡은 것도 고교시절이었다. 중학야구(토성중)시절부터 '대어'라는 기대 속에 진학을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과연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상상치 못하고 있었다.

보통 고교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3학년 때이다. '대학진학'이라는 당면과제 앞에 자연 출장 기회가 많을뿐더러 실력과 체격도 가장 왕성한 시기이기 때문. 헌데 1975년 고교 2학년의 최동원은 전국 우수 고교 초청 대회에서 당시 고교 최강의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의 대기록을 작성한다. 이어 서울의 강호 선린상고(현 선린정보고)마저 셧아웃 시키며 화려하게 이름 석자를 전국에 내민다. '고2의 반란'이라고나 할까.

고3때는 군산상고를 물리치고 청룡기를 우승으로 이끌며 부산을 들썩이게 한다. 그는 '선발=완투'공식을 만들었고, 매 경기 15개 전후의 삼진을 기록했으니 상대팀은 9회를 치르는 동안 5회를 삼진만 당한 셈이었다.

한일고교야구에선 그의 실력이 일본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갑자원 대회가 끝나면 우승팀과 재일교포 선수를 묶어 고교선발을 파견 '한-일 고교야구대회'가 펼쳐졌고 이 대회에 쏠린 국민적 관심은 지대했다. 76년 대회에서 최동원은 완벽투를 선보이며 일본의 자랑 '사까이'를 눌러 야구가 국기인 일본열도에 최동원의 존재를 신고한다.

3. 연세대 시절 구타사건과 박철순

부산 야구의 주축인 경남고와 부산고의 선수들은 고려대로 많이 진학했다. 프로팀인 롯데자이언츠의 올시즌 선수를 봐도 고대출신 7명에 연대출신 1명(문동환)인 것이 그 계보를 증명한다. 고려대도 최동원의 스카우트를 자신했다. 하지만 아버지 최윤식씨는 최동원과의 합의 끝에 연세대로 방향을 바꾼다. 연-고대의 스카우트 싸움은 언제나 치열했고, 지금도 그러하지만 최동원이란 대어를 놓고 붙은 한판승부는 당시로선 이슈였다.

일본 프로야구 '롯데오리온즈'(현 지바 롯데마린즈)의 스카웃 파동이 언론을 한차례 뒤흔들었지만 흐지부지 되며 최동원은 신촌 독수리로 변신했다.

최동원이 대학 1학년 재학시절인 77년은 연세대가 국내 최강팀의 위용을 자랑했다. 당시 실업과 대학을 통틀어 최동원의 연대를 당해낼 팀이 없었다. 라이벌인 고려대(실력 보단 정신력이 많이 작용하는 경기)외엔 적수가 없었다. 정기전에서 최동원은 4년 동안 3승1패로 모교에 보답한다. 또한 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슈퍼 월드컵 대회’우승에도 기여하며 국민적 스타로 발돋움한다(개인성적 3승 2패).

1979년 3월 25일. 언론은 최동원이 연세대 야구부를 무단 이탈했다는 보도를 한다. 문제의 시발점은 4일전인 3월21일 대통령기 대학야구(춘계대회) 준결승에서 동국대에 2-4로 지자 선배들이 채벌을 가한 것.

보통 '줄빠따'로 명명되는 이 관례는 4학년이 '타작'을 시작, 1학년은 거푸 '찜질'을 당하고 끝이 난다. 이 때 매를 든 선수는 다름 아닌 박철순이었다. 박철순은 1학년을 마치고 군을 다녀온 관계로 나이로 볼 때 최고참 선수. 따라서 당연 몽둥이는 박의 손에 들였다.

최동원은 당시 '전치2주'의 부상을 입었는데, 부친인 최윤식씨가 '선수에 가한 선배의 체벌은 선수생명에 치명적일 수 있다'며 학교측과 맞섰고, 학교측은 선수단의 질서를 무시한 채 뛰쳐나간 최동원을 궁지로 몰아세웠다. 결국 최동원은 이 사건으로 정신적 방황에 잠시 빠지게 되고 2달여 만에 소속팀으로 복귀한다.

4. 실업야구와 최동원

81년 2월 연대를 졸업한 최동원의 진로는 또 한차례의 스카우트 전쟁을 예고했다. 하지만 이번엔 비교적 시원하게 아마롯데의 승리로 끝이 났다. 당시 거액을 주고 최동원을 스카우트할 능력을 지닌 팀은 롯데와 한국화장품 밖에 없었다. 롯데는 82년 프로로 전향했고, 신격호 구단주의 야구에 대한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지대하다.

한국화장품은 임광정 회장이 대한야구협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야구단에 대한 꾸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프로야구팀이 생길 때마다 해당기업에 거론되기도 했다. 아무튼 롯데로 입단한 최동원의 조건은 파격적이었다. 사이닝보너스 3천만원을 포함 총 1억원의 대우를 받은 것. 지금의 돈으로 환산할 때 7-8억원 정도의 금액이다.

실업야구에도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는 물론이고 코리언시리즈가 있었다. 82년 출범한 프로야구도 세미프로였던 실업야구를 그 모태로 하고 있었다. 최동원은 데뷔 첫해에 17승 4패의 호투를 선보이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5. 국제 무대와 최동원

최동원은 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의 우승으로 병역 특례를 받았다. 하지만 이보다 일찍 혜택이 주어졌다면 빠른 공의 최동원은 일찌감치 미국이나 일본야구에서 한국의 존재를 알렸을 것이다. 반대로 또 다른 측면에서는 국내야구의 활성화 차원에서 최동원이 기여한 바를 따져볼 때 '잘하면 무조건 나가야 한다'는 원칙은 공식이 아니라는게 필자의 주장이다.

1981년 8월 캐나다 애드먼튼에서 열린 대륙간컵에서 최동원은 최우수 선수상을 받았다. 호쾌한 투구동작에서 나오는 빠른 직구는 얼핏 봐도 감탄사가 나올법하다. 메이져리그 스카우터들에게 번쩍거리는 금테안경의 동양인 선수는 관심의 대상이었고 '최동원 부자'는 미국행에 휘말린다.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최동원의 상품가치를 인정하고 계약을 원했다. 결국 부친 최윤식씨는 일단 계약을 하고 추후 병역 등 제반문제를 처리하자고 주장했고, 토론토 측이 합의하면서 4년간 61만불에 계약을 체결한다. 하지만 미국 정보에 뒤진 최윤식씨는 최동원이 받은 대우가 초라한 것을 뒤늦게 알고 '계약파기'를 주장했고, 이후 토론토 측과의 계약여부가 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와 83년 프로야구 롯데 입단에 줄줄이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했다.

최동원은 국제 경기에서 미국과 남미 팀에게 강한 모습을 보였지만 일본에는 강한 인상을 심지 못했다. 한일고교 이후 일본전은 왼손투수들이 전담하는 것도 우투수에 강한 일본타자들 때문.

6. 롯데의 최동원과 84년 우승

1983년 2월. 최동원은 부산 팬들 앞에 다시 다가간다. 롯데자이언츠와 계약금 4천만원, 연봉 3천만원, 보너스 3천만원 상당 등으로 계약을 체결한 것.

프로 데뷔 첫 해. 9승 16패. 탈삼진 148개의 성적은 최동원이라는 이름 앞에 초라한 결과였다. 시즌 말에는 요부염좌로 병원 신세를 지는 등 최동원은 프로무대에서 이러다 사라지는게 아니냐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절치부심. 84년 초 괌에서의 스프링캠프는 최동원이 프로의 절정기를 위한 몸을 만드는 중요한 시간이었고 결국 시즌 27승 13패 6 세이브,(승률 0.675) 탈삼진 2백 22개라는 호성적으로 이어졌다.

1984년 한국시리즈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당시는 전기리그 우승팀과 후기리그 우승팀간의 한판대결이던 가을잔치. 82년 OB 83년 해태에 우승을 빼앗기며 이를 갈았던 삼성은 84년 전기리그를 우승으로 이끈 뒤 한가지 고민에 빠졌다. 한국시리즈는 우승을 해야겠는데 롯데와 OB중 어느 팀을 선택하는 것이 유리할지? 라는 고민이었다.

답은 롯데였다. OB에겐 원년(82년) 한국시리즈에서 당했던(?) 경험이 있는 데다 당시 젊고 탄탄한 마운드와 관록의 타격이 부담스러웠다. 자연히 롯데는 한국시리즈에 선택되고 만 것. 평범한 내야땅볼이 오자 일부러 다리를 벌려 알을 까는 추태를 보인 삼성라이온즈는 당시 대구 경북을 제외한 전국민의 비난 속에 한국시리즈를 맞았다.

삼성의 오산은 최동원을 가볍게 생각한 것. '기껏해야 2승하겠지'라는 안이한 생각이 결국 최동원에게만 4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비열한 팀'이라는 오명을 쓴 채 지금까지도 한국시리즈를 통한 시즌우승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84년 후기리그 기간 LA올림픽으로 인해 프로야구 열기는 다소 식었지만 영남지방의 열기는 드높았고 두 팀은 결국 시리즈를 시작했다. 1차전 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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