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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조선의 붕괴는 한글 해독하는 인민 출현 때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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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인민의 탄생
송호근 지음, 민음사
432쪽, 2만5000원

“왜 우리는 외국학자, 보기를 들면 막스 베버·에밀 뒤르켐·탈코트 파슨즈 등의 학자만 다뤄야 하는가. 그것은 마치 공자 왈, 맹자 왈 등의 조선시대 식의 학문 정신성을 아직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표시인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학이 그 걸음마를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사회과학자의 뼈아픈 자기반성이 한 세대 전인 1982년 등장(강신표 『한국 사회학의 반성』)했지만, 유구한 한국적 풍토란 실로 뿌리 깊다. 사회학자 송호근(56·서울대 교수)도 새 책 『인민의 탄생』에서 서양산 학문 중독현상의 어제 오늘을 이른바 유신세대의 지적(知的) 방황과 엮어 허허실실 털어놓는다.

송호근

 “1970년대는 마르크스주의 발전론,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 서양산 근대화론이 맹위를 떨쳤고 청년들의 사고를 장악했다. 지금은 없어진 종로서적에서 각 학문의 명저들을 공급했다. 우린 그걸 원서(原書)라고 불렀다. 원서, 조선 선비들이 북경 유리창(고서점 거리)에서 구입한 책을 한서(漢書)라 불렀듯이…. 나 같은 75학번이자 사회과학대 학생들은 원서를 보물이나 되는 듯 품에 안고 시대의 해결책을 찾아 지적 탐험을 떠났다.”

 『인민의 탄생』은 매력적이다. 문제의식과 깊이에서 우리 학자의 저술 중 탑 클래스인데, 동시대를 사는 고민이 진솔하다. 우리는 실로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여기까지 왔는데, 관심은 하나다. 단절과 비약을 널뛰는 ‘괴물 한국’의 실체는 과연 뭘까. 그걸 제대로 파악하는 제3의 접근법은 없을까.

 그걸 묻는 저자 송호근은 외환위기 때 심한 자괴감 때문에 한국 사회과학의 실패를 자인했던 사람이다. 본인 말로 양심선언이었다. 유학 때 익힌 서양 이론을 무기로 사회관전평을 연신 내놓았지만 놀라운 스피드의 현실은 매번 분석·예측을 비웃었다. 다른 이들의 시도도 무력했다.

 식민통치와 분단·전쟁의 우리 상황이 참담했다. 그래서 전형적 후진국·종속적 발전이라며 질타했더니 어느 날 산업국가로 변신한 한국이 버티고 있었다. 얼떨결에 대중사회에 진입했나 싶더니 요즘엔 사회해체 징후도 뚜렷하다. 이 와중에 우리네 얼굴이 바뀌었다. 전근대의 ‘백성’에서 중산층 ‘시민’으로….

 프랑스혁명 같은 고전적 코스를 통해 시민이 형성된 것도 아니다. 그런대도 우린 광장 민주주의를 외치는 ‘디지털 유목민’으로 변했다. 결핍과 열등감을 극복했다지만, 방향 모를 분노 분출은 또 뭔가. 이런 상황에서 의미 있는 사회 공론장(公論場)을 어찌 형성하고, 책임 있는 사회 주류를 만들어갈까.

 『인민의 탄생』의 저자 송호근은 일단 우회를 감행했다. 소문난 서양산 무기를 잠시 내려놓고, 한국사회의 표층과 심층을 그의 방식으로 재점검해봤다. 본인 말로 “거시 구조, 그것들을 관통하는 배경 법칙” 파악이다. 조선시대, 즉 근대시민의 탄생 이전의 문법부터 알아내려는 학문적 잠행이다.

 실은 이 책은 목마른 이가 우물을 판 격이다. 개화기 전후 사회변동의 큰 그림을 국사학자를 제치고 뛰어들어 그가 그렸기 때문이다. 저자가 보기에 국사학자들은 실증연구를 명분 삼아 작은 그림에만 열중한다. 송호근이 파악한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 강력한 지식권력(knowledge power)의 나라다.

 성리학은 종교이자 정치요 지식이었으며, 때문에 지식·종교·정치 삼위일체가 500년을 떠받쳐 준 세 기둥이다. 한문으로 된 ‘양반 공론장(公論場)’ 위에서 성리학 신정(神政) 국가가 세워졌다. 이런 구조가 끝내 붕괴한 근본 원인은 글자를 해독하는 새로운 인민의 출현 때문이라는 게 그의 시각이다.

 세종이 만든 언문으로 새로운 꿈을 꿨던 그들이 사대부와 다른 국문 담론장을 형성했는데, 더 이상 그들은 적민(赤民)이 아니었다. 적민은 갓난아이란 뜻. 즉 부모인 군주·사대부가 보살필 대상이었다. 적민에서 인민·시민·네티즌에 이르는 우리의 100여 년 여정이 실로 드라마틱하지 않은가.

 이 책은 2부작 중 첫 권. 신간이 근대에 이르는 과정이라면, 후속책은 근대의 전개를 다룰 『시민의 탄생과 국가』(가제)로 잡혔다. 때문에 온전한 평가는 좀 이르지만, 예감은 좋다. 거창한 출사표에 비해 소득이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지만, 그런 불평은 새로운 시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즉 우리의 역사문화체의 뿌리인 조선역사를 사회학자의 시선으로 새로 읽는 맛이 새롭다. 지적 호기심이 큰 독자라면, 송호근 식 역사사회학 가이드를 따라 조선시대 입국을 감행해보길 바란다. 누구의 말대로 역사는 알고 보면 낯선 외국, 때문에 항상 새롭게 들여다봐야 할 큰 우물이 아니던가.

조우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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