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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INVEST] “시큼 쌉싸름한 향 … 프랑스 셰프도 반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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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 영국 스코틀랜드에 있는 헤리옷 와트 대학원 양조학과에 늦깎이 한국인 유학생이 있었다. 어느 날 담당교수는 세계 각지에서 모인 학생들에게 자기 나라 대표 술을 갖고 와 시음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한국인 유학생은 인삼주를 챙겼다. 여러 나라 술을 음미하던 담당교수가 인삼주를 놓고 한마디 했다. “한국 사람들은 술과 약도 구분 못 하나.” 농담이라고 했지만 학생은 주먹을 쥐고 다짐했다. “반드시 세계의 모든 애주가가 감탄할 만한 한국산 명주를 만들 테다.”

‘오미로제’를 시음하고 있는 이종기 교수

 세계에서 처음으로 ‘오미자 스파클링 와인’을 만든 한경대 친환경농축산물연구센터 이종기(56) 교수의 유학 시절 일화다. 이 교수는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오미자 연구에 집중해 4년 만에 스파클링 와인 ‘오미로제(Omyrose)’를 만들어냈다. 그동안 스파클링 와인의 대명사인 ‘샴페인(프랑스 샹파뉴 지방의 스파클링 와인)’, 그중에서도 ‘동 페리뇽’을 만들어낸 에페르네 지역 와이너리를 찾은 게 10여 차례. 처음에는 콧대를 높였던 그곳 연구진도 이젠 그의 방문을 반긴다. “오미자라는 새로운 재료에 매력을 느낀 거죠.”

 이 교수는 술 전문가다. 80년 동양맥주에 입사해 81년에는 국산 위스키 1호인 윈저를 만들었다. 영국에서 2년간 양조학을 공부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2006년 퇴사할 때까지 총 26년을 술과 함께 지냈다. “오비씨그램사가 만든 국산 위스키라면 모두 제 손을 거쳤죠.” 외국산 수입 위스키도 마찬가지다. “나라마다 약간씩 위스키 맛과 알코올 도수가 달라요. 그 나라 사람들이 선호하는 입맛대로 원액 비율을 조절해 병입하기 때문이죠.” 말하자면 지난 20년간 한국인의 위스키 맛을 좌우했던 그다. 2005년에는 충북 충주에 ‘세계술문화박물관’도 지었다.

병 디자인과 ‘오미로제(omyrose)’라는 이름은 디자인 전문업체 ‘크로스포인트’의 손혜원 대표가 지었다. 손 대표는 “한글로는 ‘오미자로 만든 로제와인’, 영어로는 ‘오! 나의 장미(빛깔 술)’라는 의미를 표현한 이름”이라고 했다. 가격은 10만원대.

 “세계적 명주를 만들겠다는 꿈은 평생의 숙제였죠.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제일 먼저 한 일은 ‘우리나라 것이면서 독창적이고 차별화된 원료’를 찾는 일이었어요.” 처음에는 쌀로 술을 만들어봤지만 300년 전통의 일본 사케와 경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과주를 만들었지만 프랑스의 유명한 사과주 ‘칼바도스’가 이미 있었다. “1등이 아니면 안 된다”는 그의 눈에 들어온 게 오미자다. “오미자의 붉은 빛깔은 여자들이 좋아하는 로제와인을 닮았어요. 시고 쓰고 매운맛은 서양인이 좋아하는 향신료의 장점을 한데 모아놓은 맛이죠. 최고의 술이 되리라고 직감했어요.” 오미자는 한국, 만주, 시베리아 남부가 원산지다. 그중 한국의 오미자가 빛깔과 맛이 월등하다.

 지난달 11일 서울 신사동에 있는 와인 바 뱅가에서는 이 교수가 개발한 ‘오미로제’를 소개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 참가했던 프랑스의 음식 장인 에릭 트로숑은 “푸아그라(거위 간), 연어, 쇠고기, 올리브 빵은 물론이고 비릿한 달걀 노른자와 먹어도 멋지게 어울린다”며 연말 파리에서 문을 열 자신의 레스토랑에서 이 술을 소개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활동하는 공연전시기획자 정예경씨도 “외국인 친구들이 한국의 오미자차를 아주 좋아했다”며 “국내외 문화행사에서 샴페인 대신 우리 술로 건배할 수 있게 돼 기쁘다”고 했다. 이 교수에겐 또 다른 숙제가 생겼다. “와인 품종이 여럿이듯 색과 맛이 다양한 오미자 품종을 개발하는 일을 시작해야죠.”

글=서정민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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