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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45) 대화가 예첸위의 네 여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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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첸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오만상을 찌푸린 적이 없고 말과 행동에 유머가 풍부했다. 권위적인 사람일수록 얼굴에 고난의 흔적이 없다는 말을 자주했다. 사진은 그가 82세 때의 모습이다. [김명호 제공]

1987년 봄, 팔순을 맞이한 예첸위(葉淺予·엽천여)는 화필(畵筆)을 놓고 회고록 집필에 들어갔다. 초고가 완성되자 손녀에게 보여줬다.
대화가인 할아버지의 지난날을 한 차례 훑어보고 난 손녀는 “잘한 일은 하나도 없고 잘못한 얘기들만 늘어놓은 반성문 같다”며 회고록을 내지 말자고 했다. 특히 할머니들에 관한 부분을 가리키며 “여자들과 차고 채이기만 한 게 뭐 자랑이라고, 할아버지 책 나오면 친구들 보기 창피해서 밖에도 못 나간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예첸위는 손녀를 달래느라 무진 애를 먹었다.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갖고 있는 궁금증을 스스로 파헤치는 것이 회고록이다. 자랑거리 늘어 놓는 건 회고록이 아니다. 네 아버지의 친엄마인 뤄차이윈(羅彩雲·나채운)을 비롯해 량바이보(梁白波·양백파), 다이아이롄(戴愛蓮·대애련), 왕런메이(王人美·왕인미) 모두가 나의 일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들”이라며 손녀를 설득했다.

친할머니 뤄차이윈을 제외한 나머지 세 여인 모두 중국인들에겐 전설적인 대예술가들이었다. 다이아이롄은 한국인 최승희와 함께 중국 현대무용의 초석을 놓은 중국 무용계의 신화였고 왕런메이는 1930년대 상하이의 영화계를 주름 잡던 여배우였다. 영화 한 편 본적 없는 시골 아줌마들도 잉디(影帝)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던 한국 출신 영화 황제 김염(金焰)의 첫 번째 부인이기도 했다.
예첸위는 한참 듣던 손녀가 “네 분 할머니들에 관한 얘기도 그냥 놔둬라. 회고록을 마치고 나면 할머니들 개개인에 관한 평전을 꼭 쓰라”고 하자 “알았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뤄차이윈은 부모가 맺어준 예첸위의 첫 부인이었다. 애석하게도 문맹이었다. 문자와 인연이 없다 보니 정신세계가 협소할 수밖에 없었다. 마작 판에 앉으면 자리를 뜰 줄 몰랐고 남자는 기를 쓰고 돈만 벌어오면 된다는 식이었다. 부부 간에 가장 많이 나눈 대화가 “돈 다 썼다. 돈 더 가져와라”와 “힘들게 번 돈이니 아껴 써라”였다.

예첸위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뤄차이윈을 고향으로 보내고 항일 선전대에 투신하며 뤼차이윈을 버렸다. 이혼은 하지 않았다. 뤼차이윈이 “나는 당당한 조강지처”라며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당시 상하이 사람들은 여자가 평생 먹고살 만한 돈을 지불해야 이혼이 가능했다. 그냥 모른 체할 경우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다.

뤄차이윈은 문혁 시절 반동 화가 예첸위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감옥에서 갖은 고생을 하다 수면제를 먹고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량바이보는 훌륭한 여류화가였다. 재주가 넘치고 예첸위와는 모든 게 잘 맞았지만 죽으면 죽었지 정부 소리 듣기는 싫다며 예첸위를 버렸다.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무용가 다이아이롄은 태평천국의 난으로 고향 광둥(廣東)이 전화에 휩싸이자 영국 식민지 트리니다드토바고로 이민을 떠난 화교의 후예였다.

1930년 14세 때 런던으로 건너가 마리 비그만(Mary Wigman), 루돌프 라반(Rudolf Laban), 안톤 돌린(Anton Dolin) 등을 사사하며 정통파 발레리나의 길을 걷던 다이아이롄은 조국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중일전쟁 발발 소식을 접하자 무용도 무기가 될 수 있다며 귀국을 서둘렀다.

귀국 도중 홍콩에서 항일의연금 모금활동을 벌이던 쑹칭링(宋慶齡·송경령)을 만났다. 쑹칭링이 이끌던 보위중국동맹(中國保衛同盟)에는 항일 만화를 그리던 중국 화가들이 몰려 있었다. 예첸위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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