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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가와 총독, 본국서 군대 지원 받아 시위 유혈 진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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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호 26면

북간도 용정 시내. 용정 서전평야에서 독립선언 경축대회가 열리자 일제의 영사관 경찰은 중국 군인들 틈에 끼어 있다가 총격을 가해 1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운동의 시대
④ 무너지는 무단통치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탑골(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했던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으로 장소를 변경하면서 탑골공원에서는 혼선이 생겼다. 독립선언서 낭독자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선언서를 낭독했는데, 태화관으로 민족대표를 모시러 갔던 학생대표 강기덕과 김원벽은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는 누가 선언서를 낭독했는가”라는 경성지법의 ‘신문조서’에 “모른다”거나 “자동차를 타고 온 일본 유학생이 낭독했다고 들었다”고 모호하게 답변했다. 낭독자는 오리무중이었다.

일제는 연행자들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했는데, 박쾌인(朴快仁)은 ‘경성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사범과(師範科)를 제외하고 거의 모두 공원에 갔다’며 “육각당(六角堂) 위에서 중절모자를 쓴 자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지만 누군지는 모른다”고 답했다. 배재고등보통학교 김교승(金敎昇)과 의학전문학교 유완영(劉完榮)도 ‘낭독자는 누군지 모른다’고 답했다. 일제는 끝내 낭독자를 체포하지 못했는데, 1970년 고양군 벽제면에 사는 해주 출신의 경신(儆新)학교 졸업생 정재용(鄭在鎔·86세)이 자신이 낭독했다고 증언했다.(독립운동사 제2권, 1975)

만세행진 방향에 대해서는 박쾌인이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종로로 나가 남대문, 의주통(義州通: 무악재 부근), 영성문(永成門: 덕수궁)·대한문(大漢門) 앞까지 갔다가 다시 서대문 밖 프랑스 영사관 앞을 지나 서대문정(町), 장곡천정(長谷川町: 소공동)에 이르러 본정(本町: 충무로)으로 가니, 해산 명령이 내려 하숙으로 돌아갔다”고 전하고 있다. 박쾌인은 고향인 충남 당진에서 체포되었다. 경성고등보통학교 홍순복(洪淳福)은 “영락정(永樂町: 저동), 황금정(黃金町: 을지로) 순서로 각 장안을 통과해 종로에서 해산했다”고 전했지만 같은 학교 손덕기(孫悳基)는 “본정 2정목(丁目: 충무로 2가) 파출소 앞까지 갔다가 체포당했다”고 말해 현장에서 체포된 사람들도 있었다고 전한다.

1 서울 종로의 만세시위. 일제의 무력 진압에 몸을 피하는 모습이다. 2 서간도 삼원포. 해외에서 가장 먼저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날 경무총감부는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을 비롯해 모두 134명을 연행했지만 이날만 해도 발포까지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언제 최초로 발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상해, 1920)는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군대를 동원해 뿌리째 없앨 방침이었으나 조선주둔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가 ‘군대를 출동시킬 수 없다’고 거절해 하세가와가 본국 정부에 새로운 병력 파견을 요청했다”며 “새로 온 군대가 학살을 자행했다”고 전한다. 평화시위대에 대한 발포 명령자는 총독 하세가와란 뜻이다.

2007년에 발견된 우쓰노미야 일기는 그간 일본에서 부인해 왔던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해 ‘일본군이 30여 명의 주민을 교회에 가두고 살해, 방화했다’고 이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제국의 입장에 심각한 불이익이 있을 것”이란 판단을 내려 간부들과 협의해 담당 중위에게 30일간 근신처분을 내렸다고 자백하고 있다.

만세시위에 당황한 하세가와는 3월 3일의 고종 장례식을 크게 우려했다. 조선총독부 관보(官報)는 하세가와가 3월 1일 ‘(고종 인산일에) 경거망동하거나 허설부언(虛說浮言)을 날조해 인심을 요란케 하는 것과 같은 언동을 감행하는 자는 본 총독이 직권(職權)으로 엄중히 처분할 것’이라는 협박 유고(諭告)를 발표했다고 전한다.
드디어 3월 3일 덕수궁과 훈련원(동대문운동장)에서 거행되는 장례식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수십만 명이 모여들었다. 오전 6시 20분 덕수궁에서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8시쯤 재궁(梓宮: 시신)은 대한문 밖에 있는 대여(大輿)로 옮겨져 유생·시민·학생들의 애도 속에 훈련원으로 운구되었다. 오후 1시30분에 훈련원을 출발한 운구는 오후 2시40분쯤 청량리에서 노제(路祭)를 지내고 5시반쯤 망우리에서 전(奠)을 올린 후 밤 11시10분쯤 명성황후가 누워있는 금곡(金谷) 홍릉(洪陵)에 안장되었다.

총독부는 국장 내내 긴장했다. 하지만 고등경찰관계연표(高等警察關係年表)가 이날 경기도 개성에서 낮에 1000여 명, 밤에 2000여 명의 군중이 시위에 나섰다고 전하는 것처럼 지방에서는 시위가 발생했지만 서울에서는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하세가와의 협박에 겁을 먹은 것이 아니라 비운의 황제를 경건하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3월 5일 보성법률상업학교 강기덕,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경성의학전문학교 한위건(韓偉健) 등의 주도로 아침부터 남대문역(서울역) 광장 일대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했다. 경찰들이 칼을 휘두르며 진압에 나서 많은 시민이 부상을 입고 남자 40명과 여자 35명이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에 놀란 하세가와는 “앞으로 정학(停學: 동맹휴업), 폐업(廢業: 상가철시)하거나 광분하는 데 열중할 것 같으면 반드시 다른 날에 후회하게 될 것”이란 내용의 협박 유고를 다시 발표했다.

그러나 3월 9일 서울 상인들이 “일체 폐점하고 시위운동에 참여하자”는 내용의 ‘경성시 상민일동 공약서(京城市商民一同公約書)’를 발표하면서 일제 철시에 나섰다. 또 독립선언식에 참석했던 학생들과 고종 인산에 참가했던 시민·유생들이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만주와 러시아령 등 해외로도 파급되어 3월 12일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三源浦)에서 첫 시위가 발생했다. 삼원포는 망국 직후 전국 각지에서 망명한 사대부들이 1911년 4월 경학사를 조직했던 추가가의 길목이었다.(절망을 넘어서 참조)

다음 날인 3월 13일에는 이상설이 망명해 서전(瑞甸)서숙을 열었던 북간도 용정촌 서전평야에서 ‘독립선언 경축식’이 열렸다. 용정의 명동학교를 필두로 70, 80리 거리로부터 280리 거리의 12개 한국인 학교 학생들은 물론 일본 학교의 한국인 학생들까지 모여들었다. 참석인원에 대해 독립신문은 3만 명, 일제의 재외 조선인 독립운동개황(在外鮮人の獨立運動槪況)은 4000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용정의 일본영사관은 연길 도윤(道尹) 도빈(陶彬)에게 ‘조선인은 일본 국민이어서 경비 임무를 맡겠다’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 그럼에도 영사관 경찰은 권총을 가지고 중국 군인들 틈에 끼어 있다가 행진 대열에 발포해 기수(旗手) 박문호(朴文鎬)를 비롯한 17명을 살해하고 3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용정 교민들은 3월 17일 영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제창병원(濟昌病院)에서 4000여 명이 운집해 일제를 성토하고 장례식을 치렀다. 서간도의 유하(柳河)·통화(通化)·집안(輯安)·흥경(興京)·관전(寬甸)·환인(桓仁)·장백(長白)·안도(安圖)·무송(撫松)현과 북간도의 연길(延吉)·화룡(和龍)·왕청(旺淸)·훈춘(琿春) 등 한인들이 이주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독립선언 경축대회가 열렸다. 3월 17일에는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태극기를 앞세운 시가행진이 있었는데 독립운동가들이 건설한 신한촌에서는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했다. 이뿐 아니라 니콜리스크·라즈토리노예·스파스코 등 러시아령 각지에서도 만세시위가 발생했다.

조선총독부의 시정(施政) 25년사는 1919년의 시위 횟수가 617건, 참가 인원 58만7000명이라고 전한다. 하지만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자료 수집의 어려움 때문에 많은 부분이 빠졌다’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서울 57회 57만여 명, 경기 304회 67만여 명, 강원 57회 10만여 명, 충청 156회 12만여 명, 전라 216회 30만여 명, 경상 132회 11만여 명, 함경 94회 5만7000여 명, 평안 314회 51만여 명, 황해 120회 9만2000여 명 등 모두 1393회 195만4000여 명이다.”

일제가 평화시위를 총검으로 진압하면서 사상자가 속출했는데, 시정(施政) 25년사는 조선인 사상자 2000여 명, 일본인 군인·헌병경찰 사상자 200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서울에 있는 통신원의 기록을 토대로 “창으로 찌르고 칼로 치는 것이 마치 풀 베듯 해서 즉사한 사람이 3750여 명이고, 중상을 당해 며칠 후에 죽은 사람이 4600여 명”이라고 전하고 있다.

연행자들은 혹심한 고문을 당했다. 해주에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왔던 김명신은 3월 2일 연백군 벽란도에서 체포되었다가 그해 10월 석방되었는데, 그의 친구는 방문기에서 “그의 하체불수(下體不遂: 하체를 사용하지 못함)를 보고 경악했다. 군은 본시 나의 동창으로서 생룡생호(生龍生虎: 용과 호랑이) 같은 청년이었는데 입감한 지 수개월에 이렇게 하체불수가 돼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심양초부(沁陽樵夫), 나의 일기(1919년 11월 12일자), 반도신문 제24호)”라고 전하고 있다.

일제는 평화 시위에 야수적인 폭력진압으로 대응했지만 이미 무단통치는 종말을 맞이한 것이었다. 일제 10년 지배의 총체적 파탄이 전 세계에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