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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동 닮은 외모 뒤엔 아픈 가족사 그는 말한다 ‘음악은 잔혹하다’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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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호 27면

2005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안나 네트렙코가 비올레타를 연기한 ‘라 트라비아타’는 초현대적 연출로 관심을 끌었다.

요즘 대유행 중인 북콘서트장에서 막 돌아왔다. 서경식 선생의 신간 나의 서양음악 순례(작은사진) 출간을 기념하는 행사였는데 내가 사회를 맡았다. 재일동포 서경식 교수를 아는 분이라면 곧장 떠오르는 기억이 있을 것이다. 1990년대 초 출간돼 지금까지 굳건한 스테디물로 자리 잡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 그리고 불행한 우리 현대사의 산증인이자 희생양이 됐던 그의 두 형. 서경식의 ‘미술순례’는 놀라움을 안겨줬다. 개인사·가족사·세계사가 어우러지며 이런 성찰적 방식으로 그림을 읽을 수가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안겨줬던 책이다. 서경식의 두 형인 서승, 서준식 형제는 고국 유학 중 간첩으로 몰려 기나긴 영어의 길로 들어섰다. 형들의 체포 당시 와세다대 불문학도였던 막내동생 서경식의 젊은 날은 구명운동으로 몽땅 바쳐졌다. 독재·파시즘·집단광기는 서경식의 영원한 테마가 됐다.

詩人의 음악 읽기 서경식의 『나의 서양음악 순례』

30대 시절의 기록인 미술순례에 이어 이번 음악순례는 50대 나이의 기록이다. 20여 년의 시차가 있고 장르가 옮겨졌으나 큰 틀에서 발상은 유사하다. 궁핍했던 어린 시절, 클래식 음악은 상류층의 전유물인 줄만 알았던 조선인 소년의 눈에 포착된 음악의 흔적이 펼쳐진다. 그랬던 그가 2000년대 접어들자 매년 거르지 않고 빈의 잘츠부르크 음악제 단골 참석자가 된다. 올해까지 12년 내내 거르지 않고 다녔던 음악제 체험과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 형들의 구명운동 과정에서 만나 친분을 쌓았던 윤이상과의 긴 인연도 소개된다. ‘상처 입은 용’으로 불리는 윤이상 음악의 예술적 가치와 사사로운 추억이 포개진다. 그리고 말러에 대한 통찰, 쇼스타코비치의 이해, 슈베르트를 향한 연민, 최근 각광받는 여러 연주자에 대한 평가가 있다. 무엇보다 오페라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며칠 전 다 읽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혼잣말을 했었다. ‘하루키 찜 쪄 먹겠는 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음악 칼럼집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에 찬탄을 금치 못했었다. 비전문가, 아마추어 음악애호가의 실력은 왕성한 주변 지식, 그리고 통찰력에서 발휘된다. 이런 면은 음악 전문가가 오히려 따라오기 힘든 법인데 서경식의 음악순례 역시 제대로 뭔가를 보여준다. 독자인 내 시야에 포착된 그의 생각을 일부 옮겨본다.

‘개개인의 인생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일찍 그 운명이 결정돼버리는 게 아닐까. 그 갈림길은 뭐니 해도 먼저 음악이나 미술 등에 대한 기호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서양음악 순례』 북콘서트에 참가한 저자 서경식 교수(왼쪽)와 사회를 본 김갑수씨.

‘음악다방에 다닌 것은 내 은밀한 낙이었지만 양심의 가책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내 마음이 부르주아적 생활을 동경하는지, 음악 그 자체를 동경하는지 나 자신도 잘 몰랐다…. 부정하면서 동경하고 동경하면서 부정했다.’

인용한 대목을 읽으면서 킥킥 웃었다. 어쩌면 그리도 똑같은지. 나 자신과 내가 아는 음악광들의 지난날이.

이런 구절도 있다. ‘처절할 정도로 고독했다.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엿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로린 마젤의 지휘로 드뷔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듣고 공연장을 나오며 했던 생각이란다. 이것 역시 세상의 모든 광이 겪는 공통체험이다. 한번 제대로 맛을 보게 되면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리라는 예감을 느끼는데 그 순간 무척 고독해진다. 세상 누구하고도 공유할 수 없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음악에서 위안을 얻는다는 것은 너무 천박하지 않느냐는 생각도 펼쳐진다. 궁극적으로 음악은 잔혹한 것이라고 그는 판단한다. 음악의 위험성, 음악의 무서움에 대해 서경식은 꽤 여러 체험을 들어 언급하고 있다. 특히 낭만파 음악이 감추고 있는 죽음에 대한 유혹과 충동은 실감이 난다. 슈베르트 가곡들은 죽음을 향해 타들어가는 심지처럼 느껴지고는 한다.

북콘서트가 펼쳐지는 동안 저자를 계속 강호동이라고 불렀다. 꽉 찬 관객들이 와르르 웃는다. 실제로 꽤 닮았는데 관객이 왜 웃는지 그가 알았을까. 60세가 넘은 그가 지난해 결혼한 사실도 밝혔다. 수십 년간 함께 살았지만 서로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주기 위해 부인과 혼인관계를 이루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일본 전공투 세대의 가치관을 고수한 라이프스타일이다. 국가를 부정하고 국민을 혐오하면서 인류의 연대의식을 꿈꿨던 한 시절의 시대정신. 그래서 그는 바그너를 싫어하고 아우슈비츠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절대자유를 희구하는 정신이 서경식이 생각하는 예술이고 클래식 음악이다.

한국·일본·유럽이 계속 화제에 오르는 북콘서트 시간 내내 속으로 생각했다. 예술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에겐 여전히 사치스러운 일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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