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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Focus] 연극 연출 50년, 100번째 작품 내놓은 김정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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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연출가 김정옥(79)씨. 1961년 이화여대 대강당에 올린 ‘리시스트라다’란 연극으로 무대와 연을 맺었다. 올해가 정확히 데뷔 50년째다. 하나 더 있다. 24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흑인 창녀를 위한 고백’은 재공연을 제외하면, 김씨가 연출한 100번째 연극이다. 50과 100, 숫자가 딱딱 떨어지는 게 우연치곤 기가 막힐 정도다.

 이 정도 경력과 역사와 의미면, 인터뷰해야 한다. 대충 뻔한 덕담이 오가야 한다. 그런데 이 어른 눈빛, 예사롭지 않다. “모노드라마만 묶어 축제를 할 계획”은 그나마 점잖았다. “내년에 영화 하나 만들려고 해. 못다 쓴 소설도 쓰고, 시집도 한 권 낼 계획”이라며 구체적 일정을 또박또박 얘기할 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나이 여든, 연출가 김정옥의 얼굴은 아직 소년이었다.

글=최민우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팔순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건강해 보이십니다.

 “그래요? 하고 싶은 일 하고 살아서 그럴까요.”

●지금 경기도 광주에 살고 계시죠?

 “2004년 광주에 ‘얼굴 박물관’을 열었어요. 연극이라는 게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거기엔 사람의 얼굴이 있으니 ‘얼굴 박물관’은 내게 딱 맞는 아이템인 셈이죠. 법정 스님이나 피천득 선생의 초상화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유명인의 얼굴을 전시하는 게 우리 박물관의 지향점은 아닙니다. 목각 인형도 있고, 가면도 있는데 대부분 머슴이나 가난한 선비 등 이름 없는 분들의 얼굴입니다. 평범함이 진리에 가깝다고 보거든요. 그게 또한 현대 미술의 경향이고요.”

●옛날 얘기 좀 할까요. 1950년대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시고, 프랑스 유학을 갔다 오셨습니다.

 “아버지가 의사셨어요. 형님이 가업을 이었고, 전 둘째로 어릴 때부터 제 맘대로 돌아다녔어요. 가극 보러 다니고, 프랑스 예술영화 보며 폼 잡고. 뭐랄까, 괜스레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건 재미없었어요. 문학성이 뛰어난 영화에 꽂혔는데, 그게 프랑스 영화였어요. 그 영향으로 불문과도 가고 유학까지 간 거죠. 처음엔 파리 영화학교에 다녔는데, 6개월 만에 그만두고 소르본 대학에 진학해 현대 불문학을 공부했어요. 한국에 돌아와 중앙대 연극영화과 창설 때부터 교수를 했죠.”

●첫 연출작 ‘리시스트라다’는 어떤 연극인가요?

 “남자들이 자꾸 전쟁에만 참전하는 등 가정에 신경을 쓰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뿔이 난 여자들이 똘똘 뭉쳐 남성들과의 잠자리를 거부하고 결국 평화를 이룩한다는, 그리스 희극이죠. 지금 보면 별 내용이 아닐 수도 있지만 당시는 5·16 군사혁명 직후였어요. 서슬 퍼렇던 시절이라 ‘외설적이다, 반전의 내용을 담고 있다’며 걸릴 수 있었죠. 근데 이화여대에서 공연하고 이대생들만 출연해 그런지 당국에서도 별로 신경을 안 쓰는 눈치였어요. 덕분에 나흘간 공연에 중간 통로까지 꽉 찼죠. 출발이 그래서였는지 이후에도 풍자극을 주로 올렸어요.”

●63년 민중극단, 66년 극단 ‘자유’를 만드셨는데.

 “고(故) 이근삼 선생, 양강남씨와 함께 민중극단을 창립했죠. 3인 집단지도체제였어요. 3년 해보니 아니더군요. 주인 없는 공기업이 엉망인 것과 같은 이치죠. 말로는 집단체제지만, 적자가 나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3년 뒤 이병복씨와 의기투합해 극단 ‘자유’를 만들었죠. 이번엔 역할을 분명히 나누었어요. 이씨가 제작자, 내가 예술감독으로. 그것도 여의치 않았어요. 아쉬워요.”

연극 ‘흑인 창녀를 위한 고백’의 출연진.

●극단 ‘자유’라면 예술적 성취가 많았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극단인데요. 뭐가 아쉽다는 말씀인 거죠.

 “이씨도 나도 예술에만 관심을 두었지 경영에는 소홀했죠. 우리랑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시작된 게 아사리 게이타 대표의 ‘시키’예요. 시키 보세요, 지금 10개 가까운 극장을 갖고, 단원도 1000명이 넘는 엄청난 규모잖아요. 저도 지금까지 신작 100작품 올렸는데, 그중 제 주머니에서 돈 나간 건 두 번뿐이에요. 나머진 다 흥행에 성공했죠. 그렇다면 뭔가 남아야 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경우죠. 초창기에 연습실이 없어 곤란했어요. 당시에 옥인동에 시영 아파트가 싸게 나왔어요. 그거 세 개쯤 사서 다 트면 그럴싸한 연습실로 사용할 수 있었는데, 그랬다면 부동산이라도 올라 지금 후배들에게 연습실이라도 물려줄 수 있었는데, 그런 면이 아쉬운 거죠.”

●그래도 연극은 가난해야 본래의 정신을 지키는 거 아닐까요.

 “한번은 호암아트홀에서 세 작품을 연달아 올렸어요. ‘따라지의 향연’ ‘도적들의 무도회’ ‘화니와 마리우스’. 다 터졌어요. 호암아트홀에서도 연극이 될 수 있겠다 싶었죠. 근데 우리가 이렇게 성공하니깐 다들 난리가 났어요. ‘왜 자유한테만 특혜를 주느냐’고요. 그래서 이후엔 극장 대관이 되지 않았어요. 결국 우리도 피해 보고, 호암아트홀 연극 기획도 주저앉고 말았죠. 가난한 연극 좋습니다. 하지만 가난하다는 변명이나 핑계를 앞세워 국가 지원금에만 의존하는 건 아니라고 봐요. 연극의 가장 큰 스폰서는 관객이 돼야 합니다.”

 극단 ‘자유’는 스타를 배출하는, 배우 양성소로도 유명했다. 당대 최고의 인기 여배우인 나옥주씨가 주연으로 활약했고, 당시엔 신인급이었던 최불암·김혜자씨도 ‘자유’를 거쳤다. 김 연출가는 “김혜자씨는 순둥이였지만 연기만큼은 독종이었다. 아침에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고도 저녁 연습에 나올 정도였다. 최불암씨는 어눌해 보이지만 치밀한 계산을 하고 애드리브를 칠 만큼 여우였다”고 회상했다.

●수많은 작품이 있지만 지금도 회자되는 건 79년 작 ‘무엇이 될꼬 하니’입니다.

 “내 작품에서 일관된 건 ‘서구 연극의 반항’이자 ‘한국 연극의 정체성’이었어요. 당시엔 우리 것은 후진적이고, 서구 연극이 가야 할 방향인 것처럼 인식되었거든요. 서양 연극을 신극(新劇)이니 정극(正劇)이니 불렀죠. 그럼 우린 구극이고, 부정극인가요? 무조건 서양 연극을 따라 하지 말고 한국적 문화유산을 최대한 연극에 도입해 보자고 해서, 판소리며 무속·가면극·무술 등을 활용했죠. 그 결정체가 ‘무엇이 될꼬 하니’였습니다. 해외에서도 호평이 이어졌죠.”

●95년부터 2002년까지 국제극예술협회(ITI) 세계본부 회장을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한국적인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이가 해외 교류에 가장 앞장섰다는 것도 어찌 보면 아이러니죠. 그게 동전의 양면입니다. 외국과 많이 일해 본 사람이 자기 고유의 색깔을 찾게 되고, 또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한 사람이 해외 교류에도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전 국제극예술협회를 운영할 때도 지나친 서양 중심의 문화 ‘일방성’에서 주도권이 제3세계로 넘어가는, 문화의 ‘다원성’을 강조했습니다. 대등한 위치가 될 때 문화는 균형을 잡고 서로 소통할 수 있으니까요.”

●2000년부터는 문예진흥원장을 하셨는데.

 “취임할 당시 경영 실적이 아주 나빴어요. ‘왜 문예진흥원이 골프장을 운영하느냐”며 정치적으로도 휘둘렸고요. 예술이 그냥 뜬구름 잡는 게 아닙니다. 탄탄한 재정을 확보해야 독립성을 갖게 되는 거죠. 열심히 싸워 골프장 지키고, 진흥기금을 확충한 것은 지금도 뿌듯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연극 후배들에게 조언하신다면.

 “연극은 피곤한 작업입니다. 사람끼리 부닥치는 게 어렵죠. 근데 그런 것에 치이다 보면 어느 순간 놓치는 게 있어요. 최후의 대결 상대인 관객을 잊는 거죠. 예술이란 결국 내가 도취하는 게 아니라 타인이 인정해 주는 겁니다. 마지막까지 붙잡고 싸워야 할 건 관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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