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피 효과 … 살레, 면책 약속받고 33년 만에 퇴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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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카다피가 어떻게 됐는지 똑똑히 지켜봤습니다. (목숨을 놓고) 게임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죠.”

 압둘라 알사이디 전 유엔 주재 예멘 대사는 23일(현지시간) 뉴욕 타임스(NYT)에 알리 압둘라 살레(Ali Abdullah Saleh·69) 예멘 대통령이 33년 만에 권좌에서 물러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날 걸프협력협의회(GCC)가 마련한 권력 이양안에 서명하면서 살레는 ‘아랍의 봄’ 이후 축출된 네 번째 독재자가 됐다(그래픽 참조). 예멘에서는 지난 2월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의 알야마마궁에서 열린 서명식에는 사우디의 압둘라 국왕과 나이프 왕세제(王世弟), 예멘 야당 인사 등이 참석했다. GCC의 중재에 따라 살레는 30일 안에 압드라보 만수르 하디 부통령에게 권력을 넘기게 된다. 또 하디 부통령 주도로 여야가 함께 참여하는 거국 내각이 구성되고, 90일 이내에 대선이 치러진다. 대신 살레와 가족, 측근들은 그동안 저지른 모든 범죄에 대해 처벌받지 않는 면책권을 약속받았다.

 살레가 권력 이양을 결심한 데에는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압박과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의 비참한 최후가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살레에게 자산 동결, 여행 금지, 국제형사재판소(ICC) 제소를 거론하며 경고를 계속해왔다. 익명을 요구한 예멘 당국 고위 관계자는 NYT에 “살레는 미국과 유럽에 갖고 있는 수억 달러와 부동산을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지난 6월 폭탄 테러로 입은 중상을 치료해야 하는 그에게 여행 금지 역시 매우 두려운 제재”라고 말했다. 서명식 전날 살레와 통화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그가 중재안에 서명한 뒤 뉴욕으로 가서 치료를 받을 계획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살레의 퇴진 서명이 예멘의 혼란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우선 살레 일가의 면책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새로 불붙기 시작했다. 24일 수도 사나에서는 살레의 재판을 요구하는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해 최소 5명이 숨졌다. 아랍권 위성방송 알자지라의 인터넷판은 “서명식 뒤 예멘 국민 사이에는 ‘기쁨과 분노’라는 뒤섞인 반응이 나오고 있다”며 “이번 중재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국민이 상당수로, 시위가 계속될 것”이라고 전했다.

 살레가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여지도 있다. 그의 아들과 조카 3명은 군부와 정보기관에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살레도 중재안에 서명한 뒤 “새 거국내각에 전적으로 협조할 것”이라면서도 민주화 시위를 ‘쿠데타’라고 표현했다. 활짝 웃으며 중재안에 서명하는 그의 모습을 본 예멘 국민들 사이에서는 “이 역시 그의 책략 가운데 하나”라는 목소리도 나온다고 NYT는 전했다. 그동안 GCC 중재안을 수용하겠다고 해놓고선 세 번이나 약속을 어겨 ‘아랍의 양치기 소년’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가 실제로 권력 이양에 나설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유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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