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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주말마다 사금파리 씻고 매만지며 행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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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윤용이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23일 오후 서울 명지대에서 열린 퇴임 기념 강연에서 “많이 돌아다니고, 많이 꿈 꾼 복된 삶”이라고 우리 도자기에 바친 평생을 회고했다.

단 위에 놓인 큼지막한 달항아리가 행사의 성격을 넌지시 말해주고 있었다. ‘나의 도자사(陶瓷史) 연구 40년-회고와 전망’이란 현수막 아래 앉아있는 주인공 또한 분청 도자기를 닮은 듯 수더분하다. 23일 오후 3시 서울 거북골로 34 명지대 방목학술관 국제회의실. 이 대학 미술사학과 윤용이(64) 교수의 정년퇴임 기념 강연장은 한국 도자기 역사 바로 세우기에 평생을 바친 뚝심의 학자를 기리는 자리였다.

 “윤 교수가 전국을 돌며 옛 가마터에서 수집해온 도편(陶片)이 지금 우리 학교에만도 10개 상자가 넘어요. 성균관대 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을 지낼 때 기증한 것까지 치면 몇 가마니가 넘을 겁니다. 학생 여러분 중에 그거 유심히 들여다본 사람 있어요?”

 윤 교수의 약력을 소개하던 같은 과의 유홍준 교수는 “얼마나 우직했으면 ‘도자기 분원(分院)을 여기서 30리 옮겨라’ 하는 사료를 보고 나침반이 가리키는 그 방향 따라 30리를 걸어갔을까요”라며 웃음 속에 윤 교수를 연단으로 이끌었다.

 윤용이 교수는 『아름다운 우리 도자기』(학고재), 『우리 옛 도자기의 아름다움』(돌베개) 등 한국 도자사에 뼈대가 된 연구서를 펴내며 도자 관련 주요 학설을 펼친 학자로 유명하다. 청자가 탄생한 배경으로 다완(茶碗)의 중요성을 처음 환기시켰고, 고려청자의 기원이 9세기가 아니라 10세기임을 구체적 근거를 들어 제시했다.

 “한때 고려 상감청자의 쇠퇴가 13세기 몽고의 침입 때문이라는 선입견이 강해서 12세기 중엽에 절정에 오르고 쇠락했다는 설이 유력했죠. 하지만 이건 14세기 후반 왜구들의 침략 결과를 몽고군에 떠넘긴 일본 연구자들 학설을 우리가 실증적 조사 없이 받아들인 결과였어요. 상감청자는 고려불화처럼 14세기 전반까지도 지금 이 화면에 보시는 것처럼 1m가 넘는 대형 매병이 제작되는 등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윤 교수는 “지금 고려청자 전체의 기준이 흔들리고 있다”며 “청자의 연대 기술, 즉 편년이 재구성돼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조선 백자도 사화(士禍)와 당쟁 탓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16세기까지 뛰어난 백자가 생산됐다는 예를 여러 점의 작품으로 소개하자 한국미술사 연구자들로 채워진 객석에서 “아!”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조선 분청자와 백자도 마찬가지로 사용자들의 요구와 시대적 변화를 포함한 새로운 해석과 이해가 요구된다”고 설명한 윤 교수는 “나의 연구 결과가 한국 도자사 성립에 작은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강연을 마무리하는 윤 교수의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앞줄에 나란히 앉아 경청하던 가족을 바라보며 그는 목이 메었다. “집사람이랑 아이들이 이해가 안 갔을 겁니다. 수십 년을 주말마다 배낭 메고 떠났다가 사금파리를 잔뜩 지고 돌아와 수돗가에서 씻고 매만지며 골똘한 가장이 얼마나 야속했겠습니까. 그러나 그게 제겐 큰 기쁨이었으니….” 말을 잇지 못하는 그에게 큰 박수가 쏟아졌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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