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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홍상수의 비굴한 세계와의 악수

중앙일보

입력

[정윤수의 영화읽기]

"홍상수의 비굴한 세계와의 악수 '오! 수정'"

오! 수정
감독·각본 홍상수
출연 정보석·이은주·문성근

요즘을 일컬어 광고시대 혹은 브랜드시대라고 하지만, 그 점에서 탁월한 언어감각의 소유자들이 광고업계에서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특급의 자리는 역시 예술가들을 위해 남겨놓을 필요가 있다.

물론 카피라이터들 역시 인간에게 허락된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참으로 신선한 언어의 잔치를 벌이지만, 그래도 언어가 삶의 무기이며 최후 조건인 예술가들 특히 작가들이 베푸는 언어의 향연은 그야말로 투혼(投魂)
, 즉 혼을 던져 펼치는 고통과 열락의 잔치여서 그 어디에도 비길 바가 아니다.

제목과 연관된 언어감각이란 단순한 말의 유희가 아니라 어떤 정신적 이정표와 같다. 이를테면 “서울 1964년 겨울”의 김승옥이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의 이제하 등의 제목 짓기는 “객지” “돼지꿈” “장길산”의 황석영처럼 투박하면서도 저돌적인 악력이 느껴지는 민중문학쪽과 달리 스산한 영혼의 한 축을 보여주려는 어떤 문학적 경향의 일면을 잘 드러낸다. 김수영과 박인환 등이 해방과 6·25 사이에 만든 동인 시화집 제목을 상기해 보자. “새로운 都市와 市民들의 合唱”, 이 얼마나 기막힌 제목인가.

어둠 속에서 막 빠져나온 싱그런 댄디들의 절묘한 감각이다. 1980년대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황지우와 이성복의 카피감각도 놀랍다. 그들의 데뷔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와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굔?물론 시집의 문학적 성취에 따른 효과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새로운 세대의 아주 세련된 감각을 여실히 보여준다.

영화쪽에서도 뛰어난 언어감각을 보인 작품들이 많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경우 영화감독이 아니었다면 1급 카피라이터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될 만큼 제목 짓기에서 뛰어난 감각을 자랑한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사보타쥬” “다이얼 M을 돌려라”가 그 대표적 예.

하지만 탁월한 제목과 영화의 예술적 성취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제목만으로는 “신이여, 과연 이 영화를 저 사람이 만들었습니까”라고 할 정도로 놀랍지만 막상 영화가 시작되면 제목 짓는 데 들인 공의 절반만이라도 영화 내용을 살찌우는 데 썼더라면 하는 영화가 한둘이 아니다. 구임서 감독의 “누가 나를 슬프게 하는?굔?어느 영화평론가의 조크성 비판처럼 바로 그 영화가 감독을 슬프게 한 경우가 되었고, 장윤현 감독의 절묘한 제목 “텔 미 섬딩”은 아주 불친절한 내러티브와 화면 밖으로까지 번져나오는 과잉된 예술가적 자의식으로 인해 ‘텔 미 낫씽’이 되고 만 경우다.

그래도 이 정도는 봐줄 만하다. 제목을 하찮게 여긴 것인지 아니면 간판 따위야 뭐 그리 대수인가 하고 대승적 자세를 견지한 까닭인지 아예 “돈을 갖고 튀어라”처럼 외국의 이름난 영화 제목을 그냥 옮겨 적은 경우도 있지 않은가.

홍상수를 얘기하기 위해 꽤 먼 우회로를 끼고 돈 것 같다. 사실 홍상수만큼 이상한 제목을 짓는 감독은 국내외를 통틀어도 드물고, 그것도 영화적 성취 또는 그 내용과 관련지어 볼 때 다소 우스꽝스럽다 할 정도로 비틀린 제목을 짓는 감독도 달리 없다.

“열두명의 성난 사나이들”이 배심원 얘기이고 “장군의 아들”이 김두한 얘기라는 것은 영화를 보지 않고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강원도의 힘”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앞의 영화에서는 돼지가 나오지 않고, 뒷 영화에서는 다만 주인공들이 그쪽으로 여행을 갈 뿐이다. 일종의 소격효과? 브레히트가 연극운동에서 활용한, 주제와 소재와 연출자와 배우와 관객의 다층적 분리에 따른 정서적 충격효과? 홍상수는 그런 절묘한 ‘외곽 때리기’ 효과를 염두에 둔 것인가.

그랬는데,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전주국제영화제의 개막작품으로 칸까지 다녀온 세번째 작품의 제목은 “오, 수정”으로, 영화속 여주인공의 이름이 수정이다. 물론 그 앞에 감탄사 ‘오!’가 붙어 남다른 제목 짓기의 특장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작들보다 한결 덜하다. 그런데, 그런 까닭일까. 영화는 뜻밖에 전작들에 비해 약하다. 좀더 솔직히 말해 실망스럽고 아쉬웠다.

물론 “오, 수정”에도 홍상수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남아 있기는 하다. 그는 영화예술에서 교과서라는 것이 과연 필요한가 하고 능청을 떨면서 자기식대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여러 등장인물들의 사소한 인연을 저마다의 각도에서 비춰보는 전작들의 방식처럼 이 영화에서도 홍상수는 세명의 남녀 주인공을 다소 복잡한 인과율에 집어넣어 이러저리 뒤섞는다.

한명의 전형적 주인공에 몰입하는 기존 영화관습과는 이미 오래 전에 결별한 홍상수이므로 이제는 이러한 적극적 트릭이 ‘홍상수표’로 굳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 정도로 약간은 식상한 바가 있지만, 어쨌거나 전형적 틀을 고집스럽게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아직은 미더운 대목이기는 하다.

영화는 젊은 처녀 수정(이은주 역)
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수정은 영화감독이 꿈인 PD 영수(문성근 역)
와 일하는 구성작가로, 우연히 영수를 따라 전시회를 보러 갔다가 영수의 후배인 재훈(정보석 역)
을 만난다.

화랑을 운영하는 재훈은 미혼인 30대 중반의 부잣집 아들. “오, 수정”은 멜로드라마의 기본적 인과율인 삼각관계를 내내 비틀고 뒤섞으면서 전개된다. 타이틀 자막으로 따지면 5부작인 이야기는 크게 두가지. 2, 4부가 영화 전체를 유지하고 그 앞뒤로 1, 3, 5부가 짤막하게 끼어 2, 4부의 전혀 다른 세 사람의 이야기를 보충한다.

그러니까 관객은 2부에서 본 인물의 캐릭터가 4부에 이르러 완전히 뒤집히는 과정을 보게 되고 그것이 1, 3, 5부의 작은 에피소드들과 연관되어 궁극적으로 세 인물의 행동 동기를 파악하게 되는 수순을 밟게 되는 것이다.

2부와 4부는 똑같은 상황을 약간 다른 각도에서 재현한 쌍생아적 설정이다. 관객은 똑같은 상황에 대한 전혀 다른 대사와 해석을 통해 세 사람의 내면에 도사린 욕망의 뿌리를 확인한다. 2부의 세 사람, 그러니까 순박한 처녀 수정, 착하고 여린 재훈, 못다 이룬 꿈을 갈망하는 영수는 4부에서 완전히 전도된다.

(그가 육체적으로 처녀인가는 별개로 하고)
수정은 2부의 순진한 모습과 달리(3부의 힌트에 의해)
함부로 재단하기 어려운 성적 메타포를 가진 여자가 되어 있으며 재훈과 영수 사이에서의 갈등은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성의 캐릭터로 변모한 모습을 보여준다. 착하디 착한 부잣집 아들 재훈도 4부에 이르러서는 수정과의 키스 도중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거나, 수정을 옆에 두고도 한때 추억을 나누었던 여자의 입술을 탐닉하는 남자로 변한다. 영수 역시 4부에서는 전혀 다른 캐릭터로 변한다. 예술가적 욕망과 자긍심으로 똘똘 뭉쳐 있던 그는 4부의 상황에서는 비굴하고 조잡한 인간으로 추락한다.

서술 과정상 2부에 비해 4부가 세 사람의 진실에 가까운 듯 보이지만 꼭 그렇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 홍상수는 ‘알고 보면 사람이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얘기를 하기 위해 내러티브를 비틀지는 않았다. 오히려 홍상수는 우리에게 ‘기억’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마치 한편의 추리극이라도 짜듯 세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주도면밀한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특히 수정은 필요한 상황에서 요긴한 무기를 적절히 꺼낼 줄 아는, 그리고 그것을 기억 속으로 우겨넣고 적당히 가려 헤아릴 줄 아는 인물이다. 알고 보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일상과 그리 다르지 않다. 5부에서 수정과 재훈은 열락의 시간을 보낸 뒤 그 흔적을 씻기(간직!)
위해 욕실로 들어가 약간의 해프닝을 벌이지만 그것은 영화 전체에 대한 마무리가 아니라 그 행위(기억)
조차 의심스럽게 만드는 미완의 포즈로 보인다.

홍상수는 모처럼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다. 영화의 마무리가 아주 산뜻한 포옹으로 끝났다는 점에서 전작들의 황폐한 몰골에 비해 화해에 가까운 것이며, 그러나 그것이 제스처일 수밖에 없다는 이유는 ‘기억에 대한 환기’와 ‘기억에 대한 왜곡’으로 수미일관한 “오, 수정”의 엔딩이 분명한 화해의 메시지로 받아들일 만큼 확연하지 않다는 것 때문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강원도의 힘”에서 홍상수는 파탄과 나락에 빠진 인간들의 일상을 점묘식으로 재현했다.

그 비참한 인간 군상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얼굴을 발견했고, 바로 그 점에서 홍상수를 선뜻 악수하기는 까다롭지만 꼭 필요한 친구라고 여겼던 것이다. “오, 수정”에서 그러나 홍상수는 화해를, 비굴한 세계와의 악수를 아주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이를 위해 홍상수는 자기 영화의 전형적 인물인 영수 대신 수정과 재훈에게 엔딩을 맡겼는데, 그 대목에 이르러 홍상수는 발을 빼고 말았다. 짝만 찾으면 된다는 자조적인 5부의 제목은 홍상수가 세상의 환멸과 권태와 비굴함에 대해 더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속말처럼 들리기도 하면서 동시에 세상의 비의를 알아차린 자로서 실은 물러설 곳이 없음을 토로하는 변태적 진술로 들리기도 한다.

홍상수는 틀림없이 세상과의 화해를 위해 영화 제목에 감탄사를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제목은 전작들의 제목이 줬던 소격효과와 달리 일정하게는 작의를 성취했으면서도 아직은 그 진흙탕에서 정신을 좀더 굴려야 한다는 다짐의 반어처럼 들린다. 원컨대 홍상수는 세상이라는 뻘밭에서 빠져나오지 않기를, 그 속에서 좀더 엉망진창의 일상을 경쾌하게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정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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