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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한옥마을입니까, 서양마을입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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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전주 한옥마을 은행나무길에 들어선 레스토랑. 파스타·피자 등을 파는 이들 음식점과 커피숍이 크게 늘면서 문화예술인들은 타지역으로 쫓겨나고 있다.

글씨와 그림을 결합한 상형한글서체로 널리 알려진 서예가 김두경(53)씨는 5년간 둥지를 틀었던 전주 한옥마을을 지난해 떠났다. 그는 2006년부터 은행나무길 모퉁이에 ‘문자향’이라는 서예체험공간을 운영해 왔다.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붓글씨를 써보고, 서예를 현대적 감각으로 활용한 T셔츠·커튼·손수건 등 생활소품 만드는 공방체험도 할 수 있었다. 몇 달 후엔 옆집에 살던 닥종이 인형 작가도 한옥마을을 떠났다.

 김두경씨는 “몇 년 새 임대료가 5배 이상 올라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며 “한옥마을에 음식점·커피숍 등이 판을 치는 바람에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아온 원주민·문화예술인들이 밀려나고 있다”고 말했다.

 ‘전통문화관광의 1번지’로 불리는 전북 전주시 한옥마을에 상업시설이 마구잡이로 들어서고 있다. 2~3년 전부터 관광객들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덩달아 커피숍·레스토랑 등이 대로변·골목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반면 전통 장인과 문화예술인들은 껑충 뛴 임대료를 감당 못해 쫓겨 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모양새로 한옥마을이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우려한다.

 지난해 한옥마을을 찾은 방문객은 350여 만 명에 이른다. 미국·중국·일본 등에서 온 외국인들도 13만명이나 된다. 관광객의 급증과 함께 한옥마을의 중심축인 은행나무길·태조로는 음식점·찻집 등에 점령당한 상태다.

 한옥마을 전체적으로 차·커피를 판매하는 업소가 30여개나 된다. 파스타·스테이크·스파게티 등을 만드는 레스토랑과 음식점은 30~40개에 이른다. 전통 찻집과 한정식·비빔밥 등 전통음식점은 이들중 20~30%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한옥마을이 서울 인사동의 전철을 밟아 가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때 ‘한국의 대표적 문화관광지’로 떠오르던 인사동은 중국산 제품과 음식점에 밀려 갤러리·서점 등 문화시설이 급감하고 관광객도 크게 줄었다. 한옥마을에 있는 모자박물관 ‘루이엘’의 조현종 사장은 “서울 인사동을 반면교사 삼아 한옥마을은 문화를 보고 즐기는 공간으로 보호하고, 상업시설은 주변으로 유도하는 정책을 써야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전주시는 최근 한옥마을에 커피숍·제과점 등이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 지구단위계획을 마련했다. 신축건물의 경우 목조물만 허용하고, 규모도 최대 330㎡를 넘을 수 없도록 했다. 임민영 전주시 문화경제국장은 “한옥마을이 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의 정체성을 살려 나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장대석 기자

◆한옥마을=도심 속에 전통한옥들이 집단적으로 모여있는 전주시 풍남동·교동 지역을 말한다. 1910~30년대 지은 기와집 700~800채가 모여있다. 안동·용인 민속촌과 달리 주민들이 직접 살아 한국의 전통문화생활 모습을 그대로 엿볼 수 있어 관광지로 인기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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