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미·중 각축전, 눈 감고 귀 막을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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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18개국 정상들이 19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서 만났다. EAS 창설 이후 6년 만에 미국·러시아가 정식 회원국 자격으로 처음 참가했다. 그동안 중국이 주도해왔던 EAS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참석한 것은 무심히 볼 사안이 아니다. 미·중이 아시아를 놓고 패권경쟁을 본격화했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번 아시아·태평양 순방길에 아시아 개입정책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그는 17일 호주 의회 연설에서 “국방예산이 삭감되더라도 아태 지역에서는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이 감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바마의 호주 방문을 계기로 호주 북부 다윈에 미군기지도 설치된다.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단락됨에 따라 대(對)중국 견제를 강화하겠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아태 지역에서 미국은 중국의 정당한 이익을 존중해 줘야 한다”며 불편한 심경을 표현했다.

미국은 중국의 독무대였던 미얀마에도 접근하기 시작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군사독재정권에 오랫동안 맞서 싸워온 아웅산 수치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존경과 격려를 표명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다음 달 1일 미 국무장관으로선 50여 년 만에 미얀마를 방문한다. 서방세계가 취해온 경제제재 조치를 완화하기 위한 행보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미·중 사이의 대치 무드는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미·일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대해 중국은 ‘경제협력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명분으로 한 중국 포위론’이라며 불쾌해하는 표정이다. 반면 위안(元)화를 국제기축통화로 끌어올리려는 중국에 대해 미국은 경계심을 감추지 않는다. 남중국해 영유권을 둘러싼 중국과 동남아 국가 사이의 해묵은 분쟁에도 미국은 개입할 태세다. 아세안 국가들은 대중국 경제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지만 안보 면에선 미국의 역할을 기대하는 눈치다. 여기에 인도·러시아 변수까지 끼어들어 동아시아 정세는 격랑이 일고 있다.

문제는 한국의 처지다. 오랜 동맹관계를 맺어온 미국, 새로운 경제 파트너로 부상한 중국 사이에서 처신하기가 이만저만 힘든 게 아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국 외교는 북핵 문제, 남북한 대치, 한·미 FTA에 손발이 꽁꽁 묶여 있다. 청와대와 외교안보라인이 G2(미국+중국) 시대의 대응전략을 사안별·상황별로 정교하게 다듬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혼자 움직이기 힘들면 아시아 다른 나라들과 어떤 식으로 보조를 맞출지 고민해야 하는데 그런 흔적도 안 보인다. 이미 국정운영 능력을 상실한 것 같은 여야 정치권은 눈 감고 귀를 막고 있다. 미·중 대치 시대에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국가적 차원의 전략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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