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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건설산업] “사람은 넘치는데 일감이 없다"

중앙일보

입력

‘일손을 놀릴 수 없어 입찰에 낀다.’

21세기 문턱에 선 우리 건설업체들의 현주소다.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로 실상이 드러나고 있는 건설산업은 지금 벼랑끝에 서 있다. 남아서 공사를 맡는 게 아니라 쓰러지지 않기 위해 일감을 따고 있다. 관급공사고 주택사업이고 일감이 달리기 때문이다. 수익성이 떨어지기는 해외건설도 마찬가지다. 내부의 문제는 더 심각하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건설업이고, 허가증만 있는 페이퍼 컴퍼니들도 수두룩하다. 외형 위주의 성장과정에서 적당주의, 불공정 하도급 등 그릇된 관행들은 고질로 자리잡았다. 위기의 건설산업, 원인은 무엇이고 처방전은 어떻게 써야 할지 집중 분석했다. <편집자>

지난 5월 말 불거진 현대건설의 자금 유동성 문제는 국내외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다. 아파트 분양시장에서는 단숨에 찬바람이 불었고 해외 건설공사 발주처들 사이엔 한국의 건설사를 믿지 못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급기야 건설교통부 장관이 나서 “현대건설 유동성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내용의 공문을 동남아 등 주요국 발주처에 보내며 진화에 나섰다.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가 그 정도이니 다른 건설회사들의 자금력에 심각한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주택산업연구원이 최근 1백51개 건설사를 상대로 애로사항을 설문조사한 결과 ‘자금조달의 어려움’(43.7%)
을 가장 많이 꼽았다.

실제 최근 들어 자금난이 건설회사들로 확산되면서 우방이 1차 부도를 내기에 이르렀다. 분양을 잘 해 놓고 소비자들로부터 받은 1천억원의 계약금이 땅값을 빌려준 은행으로 고스란히 회수되면서 겪은 일.

차입비율이 큰 주택회사들의 취약성이 그대로 드러난 사례다. 문제는 이같은 자금난이 일부 우량건설사를 빼고는 모두 해당된다는 것. 자금담당자들은 은행들이 6월 말 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을 맞추기 위해 대출금을 회수하면서 더욱 심해졌다고 하소연한다.

문제는 돈벌이가 되는 게 없다는 점이다. 관급공사·해외건설·주택사업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수익을 올리는 게 없다.

타격이 심한 곳은 주택부문. 정부의 준농림지 폐지 방침에 따라 앞으로 수도권에서 아파트 사업을 벌이기가 어려워졌다. 업계는 연간 10만∼15만 가구의 물량이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서울 시내 재건축·재개발사업도 용적률을 제한하는 서울시 조례안 개정으로 일감이 줄어들어 “이제 사람 자르는 일만 남았다”고 아우성이다. 그렇다고 관급공사에 기댈 형편도 아니다.

업체 수는 늘어나고 일거리는 적다 보니 덤핑 낙찰이 예사고, 손해보고 공사를 벌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대한건설협회에 따르면 지난 97년 85.6%이던 평균 낙찰률(공사비 1백억원 이상)
이 지난해는 73%로 뚝 떨어졌다. 건설협회는 90년 2백87억3천원이던 업체당 평균 수주액이 올해는 90억원으로 급감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대림산업 관계자는 “관급공사는 예정가의 85% 이상 돼야 손해를 보지 않고 공사할 수 있다”며 “그렇다고 일손을 놀릴 순 없는 형편이어서 어쩔 수 없이 입찰에 참여한다”고 전했다. 주요 건설업체들은 해외건설에서 활로를 찾긴 하지만 수익성 확보가 쉽지 않다. 해외건설협회에 따르면 지난 80년대 외화가득률은 공사비의 18∼20%는 됐으나 요즘은 11∼15%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IMF 이후엔 우리업체의 대외신인도가 떨어져 보증 수수료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 이래저래 입찰경쟁력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최근 들어 고밀도 개발을 제한하는 규제가 잇따라 나오자 주택 업계들은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현대산업개발 이희연 전무는 “일관성 있는 정책 아래에서만 주택업계도 짜임새 있게 사업을 펼 수 있다”며 “안그래도 분양경기가 떨어지고 있는데 지금처럼 규제 일변도라면 도산업체들이 잇따를 것”이라고 우려했다.

황성근 중앙일보 산업부 기자 <hs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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