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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리스크도 수용하지 않는 게 가장 큰 리스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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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딜로이트 기업리스크자문본부 전무 | 제244호 | 20111112 입력 #1. 씨티은행(Citibank)이 세계 최초로 24시간 자동입출금기(ATM)를 설치한 것은 1970년대 후반이었다. 당시 시장조사 결과는 소비자들의 외면으로 ATM의 활용도가 매우 낮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전망 일색이었다. 고객들이 기계를 조작하는 것보다 창구담당자와 직접 대면하는 것을 선호하는 데다, 입출금 과정에서의 오류 발생 가능성과 분실이나 도난의 우려가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많은 사람들의 반대와 혹평 속에 거금을 투자해가며 ATM을 설치한 결과는 어땠을까.

#2. 필름카메라의 대명사로 불리던 코닥은 80년대 초반에 이미 디지털카메라의 위협을 감지했지만 그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필름카메라 사업에 집중했다. 기존의 성공에 안주했던 코닥은 이후 찾아온 디지털카메라 시장에서 주도권을 상실하고 존재감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됐다. 그러나 코닥은 무너지지 않았다. 필름과 필름카메라 부문의 수익이 급격히 감소하자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몸집을 줄였다. 동시에 카메라에 필요한 이미지 처리기술을 바탕으로 2000년대 중반 이후 프린터·캠코더 등 디지털 제품을 출시하며 사업 포트폴리오를 바꿔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코닥이 위기를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기업 위기 관리의 새 패러다임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발 재정위기, 일본 대지진 등 굵직한 사건들을 거치면서 이른바 리스크 관리에 대한 기업들의 관심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 리스크를 식별하고 평가하며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는 일련의 과정은 위기가 일상화한 시대적 흐름 속에 기업의 생존을 좌우하는 중대 변수로 부상했다.

리스크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종류에 따라 전략, 재무, 운영, 법규 준수 리스크 등으로 구분할 수 있고 발생 원천에 따라 내부 리스크와 외부 리스크로 나눌 수 있다.
기업가치의 측면에서 보면 이미 확보하고 있는 기업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관리해야 할 리스크(unrewarded risk)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감수해야 할 리스크(rewarded risk)로 구분할 수 있다.

기업활동과 관련된 제반 법규를 준수한다거나, 정확하고 완전한 공시정보를 적시에 투자자에게 제공하는 것은 전형적인 리스크 관리에 속한다. 회사 자산의 횡령이나 유용 등 부정행위를 예방하고 적시에 적발할 수 있는 부정방지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활동 역시 기업가치 보전을 위한 리스크 관리다.

반면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 사업 모델, 프로세스를 개발하고 새로운 시장에 진출하거나, 다른 기업과의 전략적 제휴나 인수합병을 통해 기존의 기업 역량을 보완하는 활동은 추가적인 기업가치를 창출하고자 하는 ‘기회’ 관리라고 할 수 있다.

리스크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리스크의 부정적인 측면만 바라보고, 제거하거나 회피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은 옛날 얘기다. 반대로 리스크를 기회로 삼아 이를 활용하는 기업은 새로운 경쟁우위 요인을 추가하는 셈이다.

불확실성과 변화가 지배하는 시대에 장기적인 성장 발전을 위해 필요한 리스크를 감수하고 만일의 실패에 대비해 충분한 여력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지속 가능 경영의 기본이다. 이처럼 리스크를 성장 기회로 보고 전사적으로 관리하는 기법을 ‘리스크 인텔리전스(Risk Intelligence)’라고 한다.

리스크를 적극 수용하면서 동시에 이를 잘 관리할 수 있는 기업은 안정적인 시장지배력을 확보할 수 있다. ATM 설치라는 모험은 ‘씨티은행은 결코 쉬지 않는다’는 광고와 어우러지면서 기존의 금융거래 관행에 일대 변혁을 초래했고, 이후 씨티은행은 변화의 선도자로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복원력(Resilience)과 민첩성(Agility)
기업가치 보전에 중점을 둔 전통적인 리스크 관리에서는 ‘복원력’이 강조돼 왔다. 기업활동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정상 경영으로 복귀하거나 이를 극복하고 지속적인 생존과 성장의 기회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효과적인 위기대응 체제를 갖춘 덕택에 9ㆍ11 테러 발생 하루 만에 영업을 재개할 수 있었던 모건스탠리의 경우나, 타이레놀 독극물 사태라는 치명적인 위기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해 빠른 시간에 소비자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던 존슨앤드존슨의 경험이 복원력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또한 대규모 인수합병 이후 사업 확장에 수반되는 리스크에 대비하기 위해 재무적 안정을 기하는 것도 복원력 확보의 예다.

기업을 둘러싼 환경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기업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민첩성’이 함께 요구된다. 힘든 상황에 대처해 재빨리 충격을 회피하거나 줄일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해 기대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재빨리 움직이는 능력을 의미한다.

‘민첩한’ 회사는 기존 제품의 경쟁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쟁자의 동향이나 새로운 기술의 출현, 소비자 기호의 변화 등을 적시에 파악해 이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을 회피하거나 감소시킬 수 있다. 동시에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함으로써 새로운 성장 기회를 맞이할 수도 있다. 부정적인 영향을 견뎌내면서도 새로운 기회를 적시에 잡아내기 위해서는 민첩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

많은 경영활동이 그러하듯, ‘복원력’과 ‘민첩성’도 일정 부분 상충관계(trade-off)에 있기 때문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조직을 분권화하고 많은 권한을 이양하면 상황 변화에 재빨리 대응할 수 있다. 반면 적절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잘못된 의사결정으로 손실을 초래할 수도 있다.

리스크 수용은 기업가 정신의 핵심
변화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하거나 기존의 사업모델에 안주하고 신규 시장진입에 실패하는 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매출과 수익 성장, 시장 점유율 제고, 주주가치 증대라는 긍정적인 기회의 이면에는 사업 실패나 손실 또는 기회비용 등의 부정적인 리스크가 공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리스크를 수용하는 것은 자본주의와 기업가 정신의 핵심이다. 아무런 리스크도 수용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리스크이며, 리스크 없이는 수익도 없기 때문이다(No Risk No Return). 법규 준수나 헤지(hedge), 보험, 손해 예방에 국한된 리스크 관리만으로는 장기적인 생존과 성장을 담보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21세기 기업은 리스크를 수용해 돈을 벌고, 리스크를 관리하지 못해 손실을 입는다. 복원력과 민첩성을 기반으로 기존의 기업가치를 보호할 뿐 아니라 리스크를 적절히 관리하면서 새로운 가치 창출과 관련된 기회를 지속적으로 탐색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리스크 인텔리전스 경영’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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