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실종 →정정 불안 … 구제금융 받아도 회생 불투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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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호 05면

5일(현지시간) 그리스 의회에서 표결된 내각 신임안이 통과된 직후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앞줄 오른쪽)와 에방겔로스 베니젤로스 재무장관(앞줄 왼쪽) 등 각료들이 박수 치고 있다. [아테네 AFP=연합뉴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가 5일(현지시간) 의회에서 재신임을 받으면서 그리스 사태는 일단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다. 그리스 연립정부가 붕괴되고, 유로존의 지원안을 국민이 거부할 경우 국가부도(디폴트)와 유로화 탈퇴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파판드레우 재신임, 그리스 미래는

하지만 그리스가 위기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파판드레우 총리가 사임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정치권의 혼란은 내년 초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강력한 구조조정을 통해 그리스의 재정적자를 줄이는 대신 회생을 위한 자금을 지원한다는 유로존의 ‘그랜드 플랜’이 차질 없이 진행될지는 여전히 미궁 속에 빠져 있다.

그리스는 1975년부터 사회당(PASOK)과 신민주당(ND)을 중심으로 하는 의원내각제를 유지하고 있다. 현 집권 사회당은 전체 국회의원 300석 가운데 152석을 차지하고 있다. 재정적자로 그리스가 디폴트 위기에 처하자 파판드레우 총리는 지난해 4월 유럽연합(EU)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유로존과 국제통화기금(IMF)은 재정 긴축을 조건으로 3년간 1100억 유로를 지원하기로 그리스와 합의했다. 문제는 올 들어서도 그리스 경제가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못한 것이다. 파판드레우 총리는 올 5월 유로존에 추가 지원을 요청했다. EU는 2015년까지 공무원과 연금을 줄이는 등의 방법으로 280억 유로 규모의 재정적자를 줄이고, 500억 유로어치의 국유 재산을 매각하는 강력한 개혁을 요구했다. 올 6월 그리스 의회가 이를 받아들이자 유로존은 그리스 국채의 손실분담률(헤어컷)을 50%로 높이고 1000억 유로의 추가 구제금융을 주기로 합의했다.

문제는 그리스 국내에서 이 같은 조치에 대한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높은 실업률로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진 데다 재정 긴축으로 등록금 혜택까지 줄어든 대학생들이 선두에 섰다. 화염병이 날고 시위대 한 명이 숨질 정도로 과격한 시위가 한때 이어졌다.

파판드레우 총리가 의회에서 재신임을 받으면서 일단 디폴트로 직행하는 위기는 면했다. 하지만 산 하나를 넘었을 뿐이다. 파판드레우 총리는 신임투표를 앞두고 “야당을 포함한 거국 내각을 구성하기 위해 필요하면 사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야당은 조기 총선을 요구하고 있다. 사회당과의 과도정부 구성협상도 거부했다. 이에 대해 파판드레우 총리는 “조기 총선은 구제금융 지원을 위험에 빠뜨리는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며 반대 의사를 명확히 했다. 하지만 현 집권당은 의석 수가 과반을 간신히 넘기는 수준인 데다 지지율은 15% 선까지 떨어진 상황이다. 내년 선거에서 재집권에 빨간불이 켜졌다.

그리스의 정치적 리더십 부재는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파판드레우 총리 사임 후 구성되는 새 정부가 유로존과의 합의를 지키는 것이다. 재정 개혁과 구제금융 지원이 예정대로 이뤄지면 그리스는 한숨을 돌릴 수 있다. 하지만 새 정부가 유로존과 재협상에 나서면 유로 위기는 증폭될 가능성이 크다. 최악의 경우 새 정부가 기존 합의안을 파기하면 독일과 프랑스 등이 그리스의 디폴트와 유로 탈퇴를 선택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그리스에 돈을 빌려줄 사람은 없다. 그리스는 자국 화폐인 드라크마화 가치의 폭락에 따른 물가 급등과 실업률 증가로 고통받을 가능성이 크다. 유로존 역시 그리스 사태의 여파가 이탈리아·스페인으로 번지면서 수습 불능 사태에 빠질 수 있다.

무엇보다 유로 체제에서 그리스가 회생할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남는다. 그리스는 면적이 13만㎢로 남한(10만㎢)보다 조금 넓지만 인구는 1130만 명에 불과하다. 2010년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만7300달러 수준이다. 경제 구조는 서비스 산업이 78%, 제조업 18%, 농업 4%로 미국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미국의 서비스 산업은 월가를 중심으로 한 고부가가치 금융업 중심인데 비해 그리스는 관광산업 비중이 18%를 넘는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경기 침체로 관광 수입이 감소하고, 그로 인한 재정위기로 그리스가 디폴트 위기에 몰리자 유럽의 경기가 더 침체해 관광 수입이 다시 감소하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

그리스 사태의 본질은 감당할 수 없는 국가 부채다. 과잉 복지로 인한 재정 적자는 뿌리가 깊다. 1830년 4세기에 걸친 오토만 제국의 식민지에서 탈출한 그리스는 1975년에야 왕정과 군부 독재의 망령에서 벗어나 2000년 만에 공화정을 수립한다. 당시 발칸 반도는 그리스를 제외하고는 소련의 영향권에 있는 공산국가였다. 공산주의의 남하를 막기 위해 미국과 유럽은 그리스를 지원했고, 그리스 정부도 사회당은 물론 보수적인 신민당이 집권했을 때도 적극적인 복지 정책으로 국민의 지지를 확보했다. 그럼에도 90년 이전까지는 국가 부채가 GDP의 60% 선에 그쳤다. 연평균 5% 이상의 고도 성장을 이룬 데다 드라크마화의 가치 조절을 통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01년 유로존에 가입하면서 ‘게임의 법칙’이 바뀌었다. 환율 정책을 펴기가 불가능해진 반면 성장률은 낮아졌다. 전체 취업자의 25%인 100만 명에 달하는 공무원은 58세에 퇴직하면 원래 수입의 95%를 연금으로 받는다. GDP의 40%를 공공부문이 차지한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서 재정 적자가 GDP의 10% 이상으로 늘었고, 국가 부채는 GDP의 140%를 넘어섰다. 파판드레우 총리는 3대째 총리를 배출한 명문가 출신이다. 그는 81~85년, 93~96년 총리를 지낸 아버지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가 남긴 과잉 복지의 유산을 청산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렇다고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살림이 팍팍해진 그리스 국민은 “정치가들이 저질러 놓은 것을 우리가 뒤집어쓴다”고 반발한다. 나치 친위대 제복을 입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합성 사진을 뿌리며 “독일 탱크가 점령하러 왔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리스 구제금융을 부담하는 독일 국민들의 감정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슬로바키아처럼 그리스보다 1인당 GDP가 낮은 국가에서는 “가난한 나라가 왜 잘사는 나라를 돕느냐”는 반발도 나온다. 그리스 사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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