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론 안주 →변화 둔감→유권자 피로감 … 결과는 막판 역전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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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호 04면

지난 한국 정치에선 크게 두 차례의 대세론이 있었다. 1992년 대선을 앞둔 ‘김영삼(YS) 대세론’과 97년과 2002년 ‘이회창 대세론’이다. 92년 대선에서 YS는 200만 표의 넉넉한 차이로 맞수인 민주당 김대중(DJ) 후보에게 승리한 반면 97년과 2002년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30% 이상의 여론조사 지지율을 유지하다 결국 두 번의 쓴잔을 마셨다. 대세론 주장이 바람에 사그라진 적도 있다. 2002년 민주당의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대세론을 내세웠던 이인제 후보는 그해 3월 광주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패배하면서 시작된 ‘노풍(盧風·노무현 바람)’에 무릎을 꿇었다.

실제론 허점 많은 대세론

미국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1991년 2월 말 당시 미국의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은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며 89%의 놀라운 여론조사 지지율을 얻어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을 전승국으로 만든 그의 재선 가능성은 당연해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다음 해 아칸소 주지사 출신인 민주당의 빌 클린턴 후보에게 패배했다.

명지대 김형준 교수는 대세론이 힘을 잃는 경우를 내부의 안일함과 바깥의 피로감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대세론이 소멸될 경우 5단계의 과정을 겪는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1단계는 새 인물의 등장이다.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의 경우 93년 YS에 의해 감사원장으로 발탁된 뒤 총리를 거쳐 ‘대쪽’으로 자리매김하며 대중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2단계가 지지도 상승과 정치적 강자로서의 입지 확보다. 3단계에선 지지세가 상당 기간 유지되며 대세론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김 교수는 “4단계에선 대세론에 도취돼 변화를 피하고 안정 지향적으로 움직이는 반면 바깥에선 유권자들의 피로감이 증가하고 검증론이 불거진다”고 지적했다. 이때 1등을 추월하기 위해 바깥에선 각종 연대로 세를 모으는 등의 정치 지형이 급변하거나, 경제 악화 등의 악재가 도출될 수 있는데 이 같은 변화에 둔감해진다는 것이다. 부시 전 대통령 진영의 경우 92년 급격히 악화됐던 경제 상황을 무시하며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로 치고 나온 클린턴 후보를 극복하지 못했다. 마지막 단계에선 민심이 이탈하며 대세론의 위축으로 이어진다.

김 교수는 “대세론은 기본적으로 누구를 상대할지의 구도가 만들어진 뒤 판단할 사항”이라며 “누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여러 잠재 주자를 쫙 펼쳐놓고 누굴 지지하느냐고 묻는 ‘인기도’ 조사는 대세론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92년 YS 대세론이 대선 승리로 이어진 이유도 구도에서 찾는다. 그는 “당시 여론조사에서 유권자의 70%가 보수로 답하는 등 보수 지형이 강했던 데다 특히 영호남에 기반한 YS와 DJ 간 맞대결이라는 구도가 강력하게 굳어져 있었기 때문에 DJ에 대한 우세를 대선까지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구도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세론의 근거로 제시되는 여론조사 지지도는 ‘인기도’ 조사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대세론은 오히려 민심의 변화에 둔감해지고 유권자들에겐 신선함을 사라지게 하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대세론의 가장 큰 한계는 대세론이라고 말하는 자체가 독이 될 수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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