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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적 갈라파고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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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현기
도쿄 특파원

1971년 TBC 일일 드라마 ‘아씨’의 최고 시청률은 70%였다고 한다. 스포츠까지 포함할 경우 2006년 독일 월드컵 한국 대 토고전의 73.7%가 최고 기록이다. 물론 생중계한 세 지상파 방송사의 시청률을 합한 수치다. 그래도 놀라운 숫자다. 그런데 일본에서 시청률 100%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얼마 전 일본의 방송 관계자로부터 듣고 깜짝 놀랐다.

 54년 12월 22일 오후 8시30분. 일본의 유도왕이라 불렸던 기무라 마사히코 대 역도산의 프로레슬링 시합이었다. 일본의 국기(國技) 유도에서 15년 무패, 13년 연속 일본 챔피언의 국민영웅 기무라가 프로레슬링으로 전향, 역도산과 격돌했다. 당시 시합을 중계한 NHK와 니혼TV의 두 방송사 시청률 합계는 100%. 전 국민이 침을 삼키며 이 시합을 주시했다. 승자는 역도산. ‘일본의 영웅’ 기무라는 피투성이가 된 채 KO당했다. 그러곤 링을 떠났다. “당초 각본에는 비기기로 돼 있었는데 역도산이 급소를 맞고는 배신했다”는 설도 있지만 어쨌든 기무라의 참패에 일본은 충격에 빠졌다. 야쿠자들은 “당장 역도산을 제거하러 가자”고 궐기했다. 분을 못 삭인 기무라 본인도 단도를 손에 쥔 채 역도산의 뒤를 밟았다 한다. 일본인에게 있어 유도는 ‘우리 것’. ‘우리 것’은 절대 보호해야 하고, 침범을 용납해선 안 됐다. 그게 일본의 정신이기도 했다.

 세월은 지났다. 세상도 변했다. 하지만 요즘 일본 내에서 58년 전 당시와 비슷한 흐름을 본다. 바로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를 둘러싼 논란이다. 미국·호주를 포함한 9개국이 함께 ‘공동 FTA’를 맺자는 게 TPP다.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협상에 나설 뜻을 내비치자 당장 전국농업협동조합중앙회 회장이 24일 총리 관저로 쳐들어갔다. 그러곤 1167만 명의 반대 서명을 들이밀었다. 단도보다 더 무서운 압박이다.

 타격을 입게 될 농민들의 반발이야 그렇다 치자. 전체 국회의원의 절반인 356명이 “TPP 협상은 ‘우리 일본’을 망하게 하는 길”이라며 반대 깃발을 들고 나섰다.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NHK, 11일 실시) TPP에 반대하는 여론은 9%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이들 의원은 “일본의 보배, 농업을 지키기 위해선 애초부터 TPP 따위에 발을 담가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협상 내용이 불리하다면 납득이라도 간다. 하지만 아예 협상도 안 하겠단다. 돌이켜보면 20여 년 전 미·일 자유무역협정 때도 그랬다. 이쯤 되면 ‘습관적 갈라파고스 증세’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남미대륙 에콰도르에서 서쪽으로 1000㎞ 떨어진 고립된 작은 섬, 갈라파고스의 고립 말이다.

 결국은 리더다. 일본 내 뿌리깊은 고질적 ‘아집(我執) DNA’를 스스로 차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도왕 기무라가 KO당해 링을 떠난 것처럼 일본 전체가 세계무대의 링에서 사라질 수 있다.

김현기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