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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중소업체 사장들 명함에 부담느껴

중앙일보

입력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임자지'

과거 개발 연대에 유행했던 대중가요의 한 구절이다. 시류를 잘 타 하루아침에 성공한 기업체 사장에 대한 서민들의 선망.질시가 담겨 있다.

하지만 요즘 신생 중소업체 경영자 중에는 '사장' 호칭을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명함에 대표.사장 직함 대신 이사.실장.부장 같은 중간 간부 직급을 쓰거나 아예 이름 석자만 달랑 새기는 경우도 있다. 대표사원.책임사원 같은 이색 호칭도 늘고 있다.

홍보대행사 퓨처커뮤니케이션스의 이승일 사장은 "유례없는 창업 붐으로 몇명 안되는 임직원에게만 일을 맡길 처지가 못되는 소기업이 많기 때문" 이라며 "명함에서 '사장' 직함을 벗어던진 경영자들은 대개 직원과 다름없이 몸으로 뛰겠다는 경우가 많다" 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에 맞춰 중소기업진흥공단은 1998년부터 팀장 이하 전 직원의 책상 명패에서 직급을 뺐다.

◇ '사장' 명함이 부담스러운 사장들〓가정용 인공위성 안테나 전문업체인 SKS시스템은 설립 1년여만에 영국 등지에 제품 수만개의 수출 계약을 따냈다.

하지만 설립자 권태인씨는 이사 명함을 갖고 다닌다.

그는 "제품 개발에 더욱 몰두하고 싶어 영업.관리를 담당하는 사장을 따로 선임했다" 고 말했다.

히트상품 시리즈 반디 볼펜으로 알려진 세아실업의 김동환 사장은 '책임경영을 하겠다' 며 '책임사원' 이라고 새긴 명함을 들고 다닌다.

애니메이션 회사 투니파크의 허관우 사장도 제품 기획에 전념하기 위해 기획팀장직을 고수하고 있다.

요즘 흔해진 대학교수.연구원의 실험실 창업 가운데 이처럼 대표직을 피하는 경우가 많다.

'사장' 호칭을 쓰지 않는 경영자 중엔 더러 불순한 동기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대리인 경영이다.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A사의 K모사장은 은행 돈을 갚지 못해 회사가 적색거래처로 분류되자 부인을 대표이사로 등기하고 자신은 사업부장으로 배후 경영을 하고 있다.

◇ 색다른 명함들〓 '사장' 명함을 쓰지 않으면 편한 경우도 많다.

상대가 부담스러울까봐, 상대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할까봐, 또는 젊은 나이에 사장 소리 듣기가 쑥스러워서 등등 이유도 다양하다.

금속가공업체인 금강샤링의 김익수 사장은 고객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서 명함에 이름 석자만 새긴 경우다. 그는 사장 직함 대신 명함 여백에 회사의 취급 품목과 본사 약도.고객용 메모 공간을 마련했다.

경기도 포천에서 직원 5명과 함께 수제가구를 만드는 드림도아의 대표 명함도 그냥 '이재학' 이다. "재량권 없는 일개 영업직원처럼 보이기 위해서" 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직접 영업현장에서 뛰는 그는 "사장 명함을 갖고 다니니까 고객들이 값을 깎아 달라고 조른다" 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무선전화기 업체 엘토텔레콤의 황석만 사장은 대표이사와 부장 직함의 두가지 명함을 갖고 다닌다. 30대 후반인 그는 관청.대기업을 상대하거나 나이 많은 고객을 접할 때 등 자신을 낮출 필요가 있을 경우 부장 명함을 쓴다.

◇ 사장 명함은 기업의 얼굴〓컴퓨터 시뮬레이션 벤처인 디지탈선일의 김장호 사장은 요즘 만나는 거래처 사장 가운데 '대표사원' 이라는 명함을 많이 받는다. 그는 "사원과 한데 섞여 일한다는 성실한 자세를 느낄 수 있어 호감이 간다" 고 말했다.

중진공 홍보실은 지난 1월부터 중소기업 홍보지원센터를 만들어 80여개 기업체의 홍보를 무료 대행했다. 이경열 홍보실장은 "사장의 명함은 중소업체 입장에서 보면 움직이는 카탈로그" 라고 강조했다. 그는 "명함을 어떻게 꾸몄는가를 보면 사장의 품성과 업체의 수준을 알 수 있다" 고 말했다.

홍승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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