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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 진로] 3. 문제는 책임경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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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파. " 1993년 10월 정주영(鄭周永)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이렇게 두마디를 던졌다.

그로부터 3년 뒤 현대중공업의 도크는 1백만t(GT 기준)이 늘어나 세계 최대(3백50만t)의 자리를 계속 지킬 수 있었다.

鄭명예회장의 지시가 있기까지 도크 확장공사를 놓고 회사 내부적으로 큰 논란을 벌였다.

당시 국내외 다른 조선업체도 마찬가지로 고민했다. 누구도 성공을 확신할 수 없어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상황에서 鄭명예회장이 총대를 멨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애물단지였던 조선산업이 97년 외환위기 이후에도 불황을 모르는 효자산업으로 변신한 계기였다.

오너경영 체제에선 이같은 과감하고 신속한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한사람의 판단력에 의존하는 게 위험하지만, 시간이 돈인 기업간 전쟁에서는 장점이기도 하다.

이런 사례는 한국 재벌사에서 수없이 많다. 이병철(李秉喆)삼성그룹 창업주가 80년대 초반 메모리 반도체 산업에로의 진출을 결정한 것도 마찬가지다.

잘못하면 그룹 전체가 휘청대는,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사업인 만큼 오너가 아니면 쉽사리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전문경영인 체제라고 해서 과감한 의사결정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잘못하면 책임질 각오를 하고, 그동안의 결정이 궁극적으로 옳았다는 믿음을 이사회 구성원과 주주들에게 심고, 이를 통해 상당한 권한을 위임받으면 전문경영인도 과감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GE)사 잭 웰치 회장은 80년대 초부터 20년 동안 최고경영자(CEO)로 있으면서 오너 못지 않은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그는 GE를 세계 최고의 우량기업으로 키웠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전문경영인은 오너 만한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

잘못하면 자리에서 물러나면 되므로, 실패하면 전부를 잃는 오너보다 책임감이 덜하다. 아무래도 주주의 입김이 세므로 위험 부담이 큰 신규사업에 진출하기도 쉽지 않다. 주가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회사의 운명을 건 대규모 투자도 마찬가지다. 위험 부담이 적고 실패해도 주가에 영향을 덜 미치는 사업에 치중하기 쉽다.

CEO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면 이 방법이 최선일 수 있다. 기아자동차의 과거 전문경영인도 그런 부류였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너보다 자리를 보전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임직원이나 노동조합 등 이해 관계자와의 연대가 필요했고 개인적 이익을 위해 기업가치를 떨어뜨렸다는 지적도 받았다.

이같은 근시안적 투자 결정 및 기업가치의 증대와 상반되는 경영자의 이익 추구가 전문경영인 체제의 단점이라면, 재벌 체제아래서의 오너 경영은 의사결정을 잘못 내릴 가능성이 크다는 약점을 안고 있다.

특히 세계화와 정보화 등 급변하는 세상에선 이런 약점이 더욱 부각된다. 오너 혼자만의 지적 능력으로 수많은 사업의 내용을 제대로 판단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재벌의 덩치가 커 쓰러질 경우 국민경제에 치명상을 줄 정도다.

한성대 김상조 교수는 "재벌이 망하면 오너뿐 아니라 국민들도 같이 피해를 보기 때문에 재벌체제의 변혁을 원하는 것" 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전문경영인 체제로 나아가는 게 쉽지 않다. 무엇보다 오너의 마음가짐이 전문경영인 체제를 원하지 않는다. 미국도 지금처럼 되는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주식 소유지분이 분산돼야 함은 물론 유능한 전문경영인을 대거 육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문경영인 없는 전문경영 체제는 불가능하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스웨덴의 발렌버그 가문이 소유는 하되 경영은 하지 않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지만, 그들도 대리인을 이사회 멤버로 파견하거나 개인 돈을 들여 전문경영인을 감시하
는 투자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유럽은 대기업의 60% 이상이 오너 경영 기업이고 미국도 기업수로만 따지면 70~80%가 오너 체제다.

결국 문제는 오너 경영이냐, 전문경영 체제냐의 이분법이 아니다.

연세대 이제민 교수는 "오너 체제냐, 전문경영인 체제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정작 핵심은 책임경영 체제" 라고 강조했다.

누가 하든 성공적으로 기업을 경영하면 된다는 인식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실패할 경우에는 '실패한 경영자는 퇴진한다' 는 원칙에 따르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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