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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ISSUE] 바다·태양·요트가 ‘건축 소재’ … 브랜드 정체성 보여 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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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면

‘섬 매장’ 천장엔 건축가 리처드 디컨이 제작한 나무 조형물이 걸려 있다. 루이뷔통 특유의 나무 다루는 기술을 응용해 제작한 것이다.

“명품 매장은 더 이상 단순한 상업 공간이 아니라 건축가에게 매우 중요한 장소가 되고 있다. 그곳이 바로 욕망을 구축하는 곳(the construction of desire)이란 점에서 본래 건축의 목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4일 미국에서 출간된 『루이뷔통과 건축, 인테리어』의 내용 중 일부다. 책의 공저자 중 한 명이며 하버드대 디자인대학원장인 모센 모스타파비는 “명품 매장과 건축가들이 경계를 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고 진단했다. 모스타파비 교수의 말처럼 명품 매장은 이제 유명 건축가들이 앞다퉈 경쟁하는 ‘명품 건축 경연장’이 되다시피 했다. f가 최신 명품 건축 경연장에 다녀왔다. 싱가포르 마리나베이샌즈 앞에 들어선 ‘루이뷔통 싱가포르 아일랜드 메종’이다. ‘세계 최초로 섬에 들어선 명품 매장’을 표방하는 이곳엔 어떤 욕망이 숨어 있는지 살폈다.

‘메자닌’이라 부르는 2층 매장에 있는 여행용 가방과 핸드백 등 상품 판매대 모습.

‘Are you crazy?’에서 출발

 2009년 가을 루이뷔통 이브 카셀 회장은 싱가포르에 들어설 새 매장을 물색하고 있었다. 루이뷔통 아시아·태평양 담당 사장 장 밥티스트 드뱅이 들고온 마리나베이샌즈 쇼핑몰 도면을 보고 카셀 회장이 말했다. “여기 이 섬같이 생긴 곳은 어때?” 드뱅 사장은 속으로 ‘제정신인가(Are you crazy)?’라고 생각했지만 “좋은 아이디어 같습니다”라고 맞장구쳤다.

 쇼핑몰을 설계한 샌즈그룹 쪽은 본래 마리나베이에 지은 두 동의 ‘섬 매장’에 식당이나 클럽을 들일 예정이었다. 5m 남짓 떨어져 있긴 하지만 다리를 건너가야 하는 ‘섬 매장’이라 독특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관광객용으론 식당이나 클럽이 제격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셀 회장은 호텔 지하 온갖 명품숍이 모여 있는 쇼핑몰에 루이뷔통 매장을 넣고 싶어 하지 않았다. 검토 끝에 프로젝트가 진행됐고 지난달 18일(현지시간) 2년여 만에 ‘섬에 들어선 세계 최초의 명품 매장’이 문을 열었다.

 개장식이 열린 18일 오전 카셀 회장과 드뱅 사장은 기자회견에서 위와 같은 에피소드를 말하며 웃었다. 이들은 “지금까지 매장 건축에 공을 들여온 루이뷔통에 새로운 이정표가 생겼다”고 자랑했다. 실내 건축에 참여한 건축가 리처드 디컨은 “매장에 들어선 고객들은 섬에 정박한 배를 타고 항해를 떠나는 기분일 것”이라고 소개했다.

매장 1층에는 여성복 섹션과 분리된 남성 상품 코너가 따로 마련돼 있다.

해저 터널로 연결된 ‘섬 매장’

 매장에 들어가는 방법은 세 가지다. 마리나베이샌즈 호텔 입구에서 다리를 건너 들어갈 수도 있고, 마리나베이샌즈 쇼핑몰 지하 2층과 연결된 ‘해저터널’로도 출입이 가능하다. ‘아일랜드 메종’의 반대편 마리나만(灣)에서 배를 타고 갈 수도 있다. 육지가 아닌 바다 쪽에 배를 댈 수 있는 시설도 마련돼 있다. 다만 배편은 매장에서 제공되지 않아 쇼핑객이 호텔 등에 요청해 따로 마련해야 한다.

 지하 2층 입구에선 ‘바다로 떠나는 여행’을 상징하는 쇼윈도가 쇼핑객을 유혹한다. 바다 위의 호화 요트가 루이뷔통 핸드백을 향해 모여드는 모습이다. 입구에 자리한 서점엔 루이뷔통 출판부에서 낸 책과 사진·건축·예술과 관련된 다양한 종류의 책을 구경할 수 있다. 일반 서점에선 비닐 포장에 싸여 뜯어 볼 수 없는 종류의 책이지만 이곳에선 모두 펼쳐 볼 수 있다.

‘루이뷔통 싱가포르 마리나베이샌즈 아일랜드 메종’ 야경.

 서점을 지나면 해저터널이 나온다. 실제로 마리나만의 바다 아래인 곳이다. ‘트래블레이터’라고 이름 붙인 전동식 바닥이 설치돼 있다. 트래블레이터 양옆 벽면은 갤러리로 꾸며져 있다. 올해 말까지 한국 작가 이세현의 작품 등 현대미술 전시가 열린다. 터널 끝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지상 매장 1층에 도달한다. 의류와 가방·향수 등을 팔고 있다. 여성 의류 매장 위쪽은 천장까지 뻥 뚫려 있고 건물 외벽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어 조명이 없어도 동남아의 태양을 만끽할 수 있다. 매장 중앙부의 계단을 올라서면 ‘메자닌’이라고 부르는 2층에 도착한다. 계단 왼편으론 일반 의류보다 더 작게 접을 수 있는 특별한 여행용 의류, 여행용구 코너가 들어서 있다. 계단 정면 유리문을 나서면 발코니가 펼쳐진다. 테이블 예닐곱 개가 쇼핑객에게 마치 요트에 탄 것 같은 기분을 낼 수 있도록 놓여 있다. VIP라면 이곳에서 만을 내려다보며 매장에서 준비한 샴페인을 마실 수 있다.

1층 VIP 응접실에서 지하 서점으로 내려가는 계단. 벽화는 일러스트레이터 루벤 톨레도의 작품이다.

매장으로 여행 떠나세요

 브랜드 창립자 루이뷔통은 1854년 프랑스에서 여행용 가방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브랜드의 기원 자체가 여행용구인 셈인데 섬 매장 역시 이를 염두에 둔 내부 설계가 눈에 띈다. 건물 천장에 달린 나무 조형물을 만든 리처드 디컨은 “2층에서 보면 조형물 사이로 바다가 보이고 햇빛도 즐길 수 있다”면서 “유리를 가린 흰 천 소재는 돛을 연상케 하려는 의도로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쇼핑객에게 ‘여행을 떠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디컨은 또 “나무에 수증기를 쬐어 가며 곡선 형태를 만들어냈는데 이 역시 루이뷔통의 여행용구 작업에 쓰이는 기법을 응용했다”고 설명했다. 명품 매장 건축이 건축가의 ‘예술품’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건축주의 이해를 충실히 대변하는 공간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섬은 920㎡ 크기다. 매장 면적은 3000㎡. 쇼핑객으로선 눈치 보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공간이다. 판매 사원이 특별한 관심만 보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매장 건축팀 책임자 데이비드 맥널티는 “매장이라 제품 판매가 목적이 아니라고 할 순 없다”면서도 “건축팀의 더 중요한 목표는 고객이 이곳에서 ‘루이뷔통의 집에 초대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측면에서 이곳이 “고객과 브랜드 사이의 감정적 반향, 즉 ‘욕망’을 일으키는 곳”이라고 정의했다. 명품 매장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고객이 브랜드의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물건을 사고 싶은 욕망을 극대화하는 곳이란 얘기다.

‘명품 브랜드 물건을 둘러보고 사고 싶은’ 쇼핑객의 욕망, ‘브랜드 정체성을 전달하고 가급적이면 오랫동안 쇼핑객이 매장 안에 머물면서 물건을 사게 하려는’ 건축주의 욕망, ‘공간에 들어선 이들에게 공간을 즐기도록 하려는’ 건축가의 욕망이 모두 실현된 공간인 셈이다.

싱가포르=강승민 기자

명품 매장엔 ‘명품 건축가’

피터 마리노, 로베르토 바초키 …

내로라하는 명품 브랜드의 매장 건축엔 그에 걸맞은 세계적인 건축가의 이름이 등장한다. ‘루이뷔통 싱가포르 마리나베이샌즈 아일랜드 메종’ 실내 건축에 참여한 피터 마리노가 대표적이다. 그는 한마디로 ‘명품 매장 건축의 종결자’다. 상하의 모두 검은색 옷을 즐겨 입어 ‘건축계의 맨 인 블랙’이라 불리는 그는 루이뷔통뿐 아니라 샤넬, 디올, 도나 카란, 펜디, 로에베, 조르지오 아르마니, 에르메네질도 제냐, 위블로, 랑콤 등의 매장을 디자인했다. 그의 건축물이 들어선 곳도 미국 뉴욕,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이탈리아 밀라노·로마, 중국 상하이·홍콩, 일본 도쿄 등 전 세계에 걸쳐 있다.

 1985년 일본 도쿄에서 설립된 건축사무소 ‘가르드’는 개인 건축가보다는 회사 이름이 더 많이 알려진 사례다. 일본뿐 아니라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싱가포르, 홍콩 등에 지사를 둔 가르드는 패션과 화장품, 시계 브랜드 등을 두루 섭렵한 건축 사무소다. 발렌티노와 이브 생로랑, 발리, 보테가 베네타, 질 샌더, 살바토레 페라가모 등 패션 브랜드를 비롯해 태그호이어, 몽블랑 등 시계 브랜드, 록시땅, 시세이도 등 화장품 브랜드 매장이 가르드의 디자인이다.

 장을 짜는 기술자였던 벨기에 출신 올리비에 랑페뤼는 ‘진열대’가 중요한 명품 매장 디자인을 주로 했다. 최고급 제과 브랜드 ‘피에르 에르메’, 고급 향수 브랜드 ‘딥티크’, 초콜릿 브랜드 ‘피에르 마콜리니’와 보석 브랜드 ‘까르띠에’가 그에게 매장 디자인을 의뢰했다.

 여러 브랜드를 아우르며 매장 건축에 뛰어드는 건축가가 있는가 하면 르네 뒤마나 로베르토 바초키처럼 특정 브랜드와 지속적인 작업을 벌이는 건축가도 있다.

 ‘르네뒤마인테리어건축(RDAI)’은 2년 전 작고한 르네 뒤마가 이끌었다. 그는 에르메스 회장이었던 고(故) 장루이 뒤마의 부인이다. 본래 건축가 출신인 르네 뒤마는 거의 모든 에르메스 매장 건축에 관여했다. 2006년 문을 연 서울 신사동의 ‘에르메스 도산파크’도 그의 작품이다. RDAI는 르네 뒤마 사후에도 에르메스 매장 건축을 전담하고 있는 회사다.

 이탈리아 출신의 로베르토 바초키는 프라다 그룹과 오랫동안 협업 중이다. 전 세계 곳곳의 프라다 매장뿐 아니라 프라다의 자매 브랜드인 미우미우는 브랜드가 생긴 88년부터 매장 컨셉트 등을 도맡아 디자인했다.

5분밖에 시간이 없다면 …

Q. 5분 안에 ‘루이뷔통 싱가포르 아일랜드 메종’을 둘러봐야 한다면 어딜 꼭 봐야 할까요.

A. 시간을 조금 더 내주면 좋겠네요. 하지만 꼭 그래야 한다면 쇼핑몰 지하 입구로 들어오세요. 그런 다음 서점을 슬쩍 둘러 보고 트래블레이터를 타세요. 둥그런 벽면을 보면 해저터널을 지나는 느낌이 들 겁니다. 트래블레이터 옆에 전시돼 있는 기획 전시도 잠깐 감상하시죠. 드디어 탁 트인 매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면 탐험을 시작하세요. 상품이 묻혀서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로 넓은 매장입니다. 탁 트인 공간과 쏟아지는 햇살만 느껴도 요트를 타고 항해에 나선 기분이 들 겁니다. 계단을 오르면 바로 맞은편 유리문을 열고 발코니로 가세요. 마리나만(灣)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입니다. 이제 진짜 여행을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시간이 5분밖에 없으니…. (루이뷔통 매장 건축팀)

1 ‘섬 매장’ 천장엔 건축가 리처드 디컨이 제작한 나무 조형물이 걸려 있다. 루이뷔통 특유의 나무 다루는 기술을 응용해 제작한 것이다.

2‘메자닌’이라 부르는 2층 매장에 있는 여행용 가방과 핸드백 등 상품 판매대 모습.

3 매장 1층에는 여성복 섹션과 분리된 남성 상품 코너가 따로 마련돼 있다.

4 ‘루이뷔통 싱가포르 마리나베이샌즈 아일랜드 메종’ 야경.

5 1층 VIP 응접실에서 지하 서점으로 내려가는 계단. 벽화는 일러스트레이터 루벤 톨레도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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