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122) 정치 입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신성일(가운데)은 1978년 1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서울 용산·마포 중선거구에서 공화당 박경원 후보 진영으로 선거운동을 벌였다. 이 사건은 신성일이 정치에 입문한 계기가 됐다. [중앙포토]


1960년대 후반부터 정치권에서 숱한 유혹이 있었다. 이를 악물고 10년을 버텼다. 78년 10월 무렵 어느 날, 집안의 아는 사람이 찾아와 “한 번만 도와달라”고 했다. 그 해 12월 12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용산·마포 지역에 공화당으로 출마하는 4성 장군 출신의 박경원 전 내무부 장관을 만나달라는 것이다. 그 지인은 내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의 아들이었다. 박 장관이 공식 통로를 통해 협조를 요청해왔지만 내가 거부하자 마지막으로 꺼내든 카드였다. 나로선 공화당과 손잡는 데 부담이 컸다.

 일단 남산 하얏트호텔에서 박 장관과 단 둘이 만나기로 했다. 호텔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박 장관은 내게 큰절을 하려고 했다.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분의 큰절을 받을 순 없었다. 내가 절을 올렸다. 맞절을 한 셈이 됐다. 잘 생기고 인자한 분이었다.

 박 장관은 선거운동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용산과 마포는 한 구역으로 묶인 중선거구였고, 박 장관의 상대는 신민당의 김원만 의원이었다. 이 지역구는 ‘3선 의원’이란 영예를 안긴 김 의원의 아성이었다. 박 장관은 자신을 공천해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보은으로 김 의원을 꺾고자 했다. 얼굴을 맞대고 보니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선거 한 달 전부터 박 장관의 특별보좌역으로 용산·마포 44개 동을 누볐다. 공화당 말기의 선거는 썩을 대로 썩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유권자를 매수하는 방식이었다. 거기서 ‘조직관리’의 실상을 보았다. 각 동네협의회장이 열성당원의 아파트를 잡아 ‘사랑방 좌담회’를 열었다. 내가 박 장관이 공화당 공천을 받은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가면, 동네협의회장이 사랑방 참가자에게 1인당 2만~3만원씩 돌렸다. 사람을 얼마나 끌어 모을 수 있는지가 동네협의회장의 능력이었다. 당시 조직관리란 돈을 확 뿌릴 수 있는 파이프라인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였다.

 자기네는 돈을 뿌리면서 상대방은 못 뿌리게 하는 게 정치의 중요한 기술이었다. 야당 쪽도 선거 임박해서는 돈을 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박 장관 측은 모월 모시, 유권자에게 뿌릴 억대의 현금 보따리가 김원만 의원의 캠프에서 나갈 것이란 첩보를 입수했다. 만원짜리 현금다발이어서 보따리는 꽤 컸다. 그 날 밤 김 의원의 심복이 현금보따리를 들고 담을 넘으려 했다. 그 심복은 뒷담을 넘었다가 붙잡혔다. 그 집 전체가 포위됐던 것이다.

 그 심복은 돈 보따리와 함께 절도범으로 파출소로 넘겨졌다. 김 의원 쪽에서도 그를 구하러 올 수 없었다. 파출소에선 투표가 끝날 때까지 시간을 질질 끌었다. 야당의 자금줄은 완전히 차단됐다.

 반면 나는 선거 이틀 전, 두 시간 동안 6개 동을 돌며 현금 3억원을 전달했다. 6개 동 협의회장들은 5000만원씩 받았다. 제대로 된 조직이라면 협의회장이 20%를 자기 주머니에 넣고, 80%를 유권자에게 돌린다. 협의회장이 80%를 착복하는 조직이라면 망조가 든 것이다. 양심이 있는 유권자라면 한 쪽에서 5000원을 받은 다음, 상대 진영에서 주는 1만원을 받지 않는다. 결국 박 장관은 자금줄이 차단된 김 의원에게 압승을 거뒀다. 정치와 선거의 생리를 훤히 꿰게 된 순간이었다.

정리=장상용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