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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115) 오수미의 통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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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73년 베를린영화제 직후 파리에서 여배우 오수미(오른쪽)를 만난 신상옥 감독. 이들은 파리에서 신성일과 함께 영화 ‘이별’을 촬영했다. [중앙포토]

1973년 베를린영화제 직후 파리에서 찍은 영화 ‘이별’에는 남모를 사연이 많다. 베를린영화제를 즐긴 나와 김지미, 신상옥 감독은 각자 시간을 갖고 일주일 후 파리에서 재회하기로 했다.

 신 감독은 작품 소재 발굴에 열심이었다. 신필름의 많은 식구를 먹여 살리려면 작품 라인업이 탄탄해야 했다. 1년에 10여 편을 잡아놓아도 그 중 7편 정도는 폐기됐다. 신 감독이 베를린영화제 참가를 계기로 구상한 작품이 ‘이별’이었다. 영화제에 참가한 여배우(김지미)가 파리에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신성일)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다. 오수미는 현지처 역할을 맡았다.

 70년 처음 만난 내 연인 김영애가 내가 베를린에 간다는 소식을 LA에서 접하고 현장에 나타났다. LA 남가주대(USC)에서 공부하던 그녀를 근 1년간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나는 영화제 대표단에 그녀를 소개했고, 그녀는 통역과 운전을 담당했다. 72년 올림픽이 열린 뮌헨이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그 곳을 방문한 다음 영국 런던으로 건너갔다. 영국 남단 도버에서 페리를 타고 프랑스 최북단 클라라에 도착한 후 육로로 파리에 들어갔다.

 신 감독은 임신 3개월의 오수미와 사랑하는 사이였다. 오수미는 홍콩에서 파리로 날아왔다. 김지미는 외톨이가 됐고, 나는 “김지미 촬영을 먼저 끝내고 귀국시키자”고 제안했다. 가장 먼저 귀국한 김지미는 공항에서 신 감독과 젊은 여배우의 관계를 폭로했다. 그 후로 신 감독과 김지미의 사이가 멀어졌다.

 신 감독은 76년 여름 최은희와 23년간의 결혼생활을 끝냈다. 오수미에게서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가정생활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그리고 78년 1월 14일 안양영화예술학교 운영자금을 구하러 홍콩에 간 최은희가 납북됐다. 그녀를 찾아나선 신 감독도 그 해 북에 끌려갔다. 북한에서 재회한 신 감독과 최은희는 86년 탈북해 미국에서 살았다.

 그 사이, 오수미는 혼자가 됐다. 81년 내가 영화배우협회 회장으로 있을 때다. 신 감독도 없이 두 아이를 키우고 있던 오수미가 나를 찾아왔다. 신 감독과 오수미는 혼인 신고한 사이가 아니었다. 신 감독의 형인 신필름의 신태민 사장은 오수미에게 “아이는 우리가 맡겠다. 이후로 연을 끊자”고 선언했다고 한다. 그녀는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통곡했다. 내가 선배였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여인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88년 내가 신 감독을 찾아갔을 때, 신 감독과 최은희는 워싱턴 DC 인근 뉴버지니아의 조용한 호반에 있는 3층짜리 빌라에서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오수미의 두 남매를 처음 봤다. 신 감독이 탈북하자 오수미가 두 아이를 돌려보낸 것이다. 나는 빌라 앞 호숫가에서 신 감독과 차를 마시며 오수미의 딱한 사정을 전했다. 당시 한국에서 책을 낼 예정이던 신 감독은 “책이 나오면 인세를 수미에게 주어야겠다”고 말했다. 그 뒤의 일은 알지 못한다.

 오수미는 그 사이에 사진작가 김중만과 결혼했다가 헤어졌다. 배우로 재기하려 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자 마약에 손을 댔다. 모델인 그녀의 여동생도 의문의 실종사고를 당했다. 그녀는 92년 하와이에서 교통사고로 42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오수미, 그녀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너무 아프다.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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