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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스페셜 - 월요인터뷰] 스타 첼리스트 요요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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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달 런던에서의 요요마. 6세에 데뷔한 후 꼭 50년 동안 변함없는 모습으로 성공을 거뒀다. 그는 “ 가장 큰 관심사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사진작가 제레미 코워트 제공]

유머러스한 천재-. 미국 대중문화판이 첼리스트 요요마(56·友友馬)를 그리는 모습이다. 요요마는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 ‘세서미 스트리트’, 정치 드라마 ‘웨스트 윙’, 애니메이션 ‘심슨’ 등에 동그란 안경, 환한 미소와 늘 함께 등장했다. 지난달 영국 런던. 요요마는 그 모습대로 인터뷰 장소에 나타났다. “제 이름은 요요마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날 그는 전 세계에서 온 기자 아홉 명과 릴레이 인터뷰를 했다. 유일한 한국 매체였던 본지 기자에게 “한국 기자와의 일대일 인터뷰는 처음이다. 축하한다”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또 미국 애플사의 아이폰을 보고 손을 흔들며 “안녕, 스티브”하고 천진하게 웃었다. 현재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스타 첼리스트로 꼽히는 그의 힘은 낙천과 긍정이었다.

-데뷔 50주년이다. 6세에 음악 영재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후 지금껏 나쁜 뉴스, 루머에 얽힌 적이 없다. 대중에게 찡그린 얼굴을 보인 적도 없다. 어디에서 그런 에너지가 나오나.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열심히 운동해야 한다.(웃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예가 한국전쟁이다. 모두가 끔찍한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있지 않나. 당신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들의 두려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그들이 정신적 상처와 싸우고 극복한 과정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사회와 역사, 특히 그 안의 사람들에게 주목할 때 당신이 누구며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된다. 그 후에는 자신이 하는 일을 비관하거나 낙담할 수가 없어진다. 내가 하버드 대학에서 인류학을 선택해 공부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 문화·사회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나.

 “연주 때문에 여러 번 갔던 덕분에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이 만든 역사가 굉장히 흥미로웠다. 특히 언어와 문학이 독립적·창의적이라는 데에 놀랐다. 백제시대 일본으로 전해진 건축·음악 등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공부하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의 칼에 그려진 꽃 문양이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다르다는 사실 등이 인상적이다. 또 현재 한국 사회 내에서 기독교·불교 신자의 비율이 비슷하다 들었다. 요즘은 그런 종교 상황을 만든 배경에 대해 공부해보고 싶다.”

  요요마는 첼로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작품을 연주·녹음한 것으로 유명하다. 영화·대중 음악까지 영역을 넓혔다. 영재로 주목받기 시작해 거장으로 안전하게 착륙한, 보기 드문 캐릭터다.

1962년 각각 7, 11세이던 요요마와 그의 누나 요챙마(왼쪽부터). 미국 워싱턴 ‘전미 예술 축제’에서 연주한 후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의 찬사를 받고 있는 모습이다.

 -한국에도 음악 영재가 많다. 이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내 얘기를 해주겠다. 19세 때 뉴욕에서 독주회를 했다. 완벽하게 연주하고 싶었고 1년을 준비한 무대였다. 아주 잘 준비된 무대였다. 연주가 시작됐고 모든 것이 잘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불현듯 ‘이건 아주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살아있지 않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때가 나의 전환점이었다고 본다. 완벽해야 한다는 마음이 문제였던 것이다. 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들릴까만을 생각했던 셈이다. 나는 이때를 ‘해야 한다(should)’를 ‘하고 싶다(want to)’로 바꾼 순간으로 부른다. 완벽해야 한다가 아니라 완벽하고 싶다고 생각을 바꾸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다. 이 점을 59세가 아닌 19세에 알게 돼서 얼마나 다행인가!”

 -그 후 연주가 어떻게 달라졌나.

 “그 전에는 연주가 하나 끝나면 신문 평을 일일이 오려놨다. 하지만 이후로는 비평에 신경 쓰지 않게 됐다. 아주 친한 친구가 저녁 식사에 초대했을 때를 생각해보라. 생선·와인 맛을 평가하지 않고, 초대한 친구도 방문자가 할 말 때문에 긴장하지 않는다. 내 음악회도 마찬가지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초대한 집주인과 같다. 그들은 비판하러 오지 않았다. 이 생각으로 이젠 무대를 즐길 수 있다.”

 -부모가 어떻게 키웠나.

 “타이거 마더는 아니었다.(웃음) 나는 굉장한 개구쟁이였다. 단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첼로를 택한 것도 단지 누나가 하던 바이올린보다 큰 악기를 하겠다고 떼를 썼기 때문이다. 레슨 시간에는 피아노 밑으로 기어 들어가서 페달을 손으로 꾹꾹 누르며 놀기만 했던 적도 있다. 부모님은 나의 이 같은 성격을 존중했던 편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에너지가 지금 좋은 방향으로 바뀌었던 게 아닐까 싶다.”

 

-모든 부모가 같지는 않다.

 “한국의 부모들은 희생을 많이 한다고 들었다. 음악 레슨비도 비싼 걸로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잘해야 한다는 스트레스 속에 산다. 하지만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콩쿠르, 대학 입학과 같은 ‘측정 가능한’ 목표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숫자나 점수로 평가할 수 없는 가치들이다. 이 균형을 맞춰야 한다. 우정·신뢰·사랑이 없는 음악가가 어떻게 행복하겠는가.”

 -50년 동안 숱한 무대에 섰고, 앨범을 발표했다. 남아있는 첼로 작품이 별로 없지 않나.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만, 쇼스타코비치 첼로 협주곡 2번을 연주해보지 못했다.(웃음) 또 젊은이들이 모여 있는 오케스트라와 자주 연주하고 싶다. 이번에 새로 나오는 앨범은 미국의 컨트리 음악을 담았다. 모든 것이 잘못되고 망가진 상황을 표현하는 단어 ‘고트 로데오(Goat Rodeo)’가 앨범 제목인, 유머러스한 음반이다. 이 제목처럼 내 음악 인생도 어디로 향할지 잘 모르겠다. 다만 과수원에 여러 가지 나무를 심어놓고 익는 순서로 과일을 따 먹듯, 음악 작업을 하고 있다. 여러 일들을 동시에 진행시키면서 가장 먼저 완성되는 것을 내놓는다. 다음 앨범이 뭐가 될지 나도 모르는 이유다.”

 -당신의 연주는 늘 어려움 없이 쉽게 하는 것처럼 들린다. 또 지나치게 매끄러운 연주 스타일도 종종 비판을 받는다. 어떻게 생각하나.

 “19세에 얻은 깨달음처럼 ‘비판을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알고 있을 거다. 그 누구도 연주를 쉽게 할 수 없다는 점 말이다.(웃음)”

런던=김호정 기자

파리서 태어나 뉴욕서 자란 중국계 미국인

오바마·잡스와도 가까워

요요마의 음악에는 ‘글로벌 DNA’가 담겨 있다. 그의 현재 국적은 미국. 부모님은 중국인이고,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다섯 살 때 미국 뉴욕으로 이민했다. 다른 문화, 타인에 대한 관심이 일종의 숙명이 됐다. 네 살 때 첼로를 배우기 시작해 2년 만에 캘리포니아에서 공식 데뷔했고, 이듬해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과의 무대가 TV로 중계된 후 스타덤에 올랐다.

 국제적·정치적 인맥도 넓다. 2002년 미국 워싱턴의 한 시상식에서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피아노)와 협연하는 파격 무대를 꾸렸다. 또 2009년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에서 연주를 맡았다. 레이건 대통령 시절에는 백악관 초청 연주를 전담하다시피 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전 CEO와도 친구 사이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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