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소심 재판장 “엄벌하려 했지만 친고죄 한계 때문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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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광주광역시 삼거동에 위치한 광주 인화학교 정문이 굳게 잠겨 있다. [광주=연합뉴스]


영화 ‘도가니’의 반향이 커지고 있다. 청각장애 청소년들이 보호받아야 할 학교에서 성적 유린을 당했는데도 가해자들은 집행유예로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는 내용에 많은 사람이 공분하고 있다. 영화의 소재가 됐던 광주 인화학교 성폭행 사건의 항소심 재판장을 28일 만났다. 현재 한 고등법원의 부장판사로 재직 중인 그는 “실명을 싣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2008년 항소심 당시 분노하지 않았나.

 “왜 안 그랬겠나. 천인공노할 일이다. ‘이럴 수가 있나. 교장이라는 사람이… 내가 줄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엄벌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심에서 교장에게 징역 5년의 실형이 선고됐는데, 항소심에서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으로 줄인 이유는.

  “1심과 상황이 바뀌었다. 피해자들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며 고소를 취하했다. 당시는 청소년 강간도 피해자가 고소를 해야 처벌을 할 수 있는 친고죄였다. (※지난해 4월 아동·청소년에 관한 성범죄는 피해자의 고소와 무관하게 처벌할 수 있도록 법률이 개정됐음.) 당시 상황에서 1심에서 고소 취하를 하면 아예 재판이 중지되지만 2심부터는 고소를 취하하더라도 재판이 계속된다. 1심에서 취하됐다면 아무런 처벌도 안 받는데 2심에서 취하됐기 때문에 실형을 선고한다면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 그래도 더 무거운 처벌을 할 수는 없었나.

 “청소년 강간의 최저 형량이 징역 5년이었다. 법정 최저형의 절반까지 깎아주는 작량감경을 해도 징역 2년6월이다. 전혀 처벌받지 않는 것과 징역 2년6월의 차이가 너무 컸다. 비슷한 경우에 다른 재판부는 어떻게 판단을 내렸는지도 조사해보고 내린 결론이다. 나도 청소년과 장애우에 대한 범죄는 더 엄벌해야 되는데 친고죄로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답답했다. 그러나 판사는 법에 따라 재판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건가.

 “내 감정대로 판결할 수는 없다. 사실 고민을 많이 했었다. 그러나 판결로 인해 어떤 비난을 받더라도 합리적으로 양형을 정하기로 결심했다. 인기에 영합하다 보면 ‘튀는 판결’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는 절대 안 된다.”

 -영화에선 ‘전관예우’로 인한 편향 판결이라는 암시가 나온다.

  “ 변호사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는 경기도 출신으로 수도권에서만 근무했고 (선고 5개월 전인) 2008년 2월에 처음 광주에 부임했다. ”

 -양승태 신임 대법원장도 ‘도가니’ 논란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양형 과정을 국민들에게 알려서 사법부의 신뢰가 깨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취지로 하신 말씀 같다.”

 -국민들은 약자에게 가혹한 행동을 한 사람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못했다는데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어젯밤에도 잠을 못 이뤘다. 이 판결로 소수 약자가 감내할 수 없이 큰 고통을 받은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기소된 사건 내용보다 더 많은 청소년 장애우들의 인권이 무참히 유린됐다고 들었다. 공소시효와 관계없이 진상이 규명돼야 한다.”

구희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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