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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다 그렇게 사는 것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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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황교익
맛칼럼니스트

오래 전 내 고향의 시장에는 우메보시, 나라쓰케가 있었다. 집 가까운 골목에는 단팥빵 공장이 있었고 우동 공장도 있었다. 일본인들이 남겨놓은 음식이었다. 이 음식을 고향 음식으로 여기며 먹었다. 고향 도시와 그 바로 옆의 도시에는 일본식 가옥이 많이 있었다. 큰아버지의 집도 일본식이었다. 2층 집이었는데 복도는 반질반질한 나무였고 방에는 다다미가 깔려 있었다. 명절이면 이 일본식 집에 온 가족이 모였다. 고향집이었다.

 내 기억 속에 일본의 것들은 일상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이 일본의 것들이 사라졌다. 고향 시장에는 더 이상 우메보시와 나라쓰케가 팔리지 않는다. 단팥빵 공장과 우동 공장도 사라졌다. 일본식 가옥도 재개발에 밀렸다. 이들이 사라지면서 그 빈자리를 한국적인 무엇이 채워진 것은 아니다. 그냥 사라진 것이다.

 나는 고향에서의 기억과 그 향수를 글로 적는 것에 두려움이 있었다. 친일이라 손가락질을 받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정치며 역사니 하는 것을 알 길 없는 유년기에 보고 먹고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기억까지 마음대로 추억하지 못하는 대한민국이었던 것이다.

 20여 년 전 이자카야라는 일본식 술집이 서울에 진출했다. 가게 앞에는 일본식 홍등이 걸렸고 간판에는 일본 민화인 우키요에가 그려졌다. 이를 두고 친일이라며 손가락질하는 일이 번졌다. 당시 잡지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던 나 역시 그런 투의 글을 썼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우키요에가 걸리는 것은 민족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 했다. 그때의 일을 지금 상황에서 재현을 하면 나는 ‘꼴통 민족주의자’ 소리를 들을 것이다. 지금 서울에는 막걸리집보다 이자카야가 더 많을 것이다.

 그 당시 그런 글을 썼을 때의 상황을 되새기면, 유년의 기억에 있던 일본의 것들이 그 글을 쓰는 데 전혀 방해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다 친일이라 손가락질을 하니 나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민족적 대의를 위해 내 유년의 기억은 말끔히 지워도 되는 것이었을 것이다. 사회생활을 잘하려면 집단이 개인을 구속하는 일에 담담해야 하는 게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다 그렇게 사는 것이다.

 정읍에 취재갔다가 전봉준 장군이 살던 집을 들렀다. 물론 복원한 조그만 초가다. 마을은 여느 농촌처럼 한가했고 골목에는 할머니들이 나와 앉아 가을볕을 즐기고 있었다. 모처럼의 관광객 방문이었는지 말을 붙이는 나를 반겼다. 10여 년 전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밤새 풍물 놀고 노래 부르고 하던 나날이 있었다고, 지금은 오는 사람이 없다고 할머니들은 말했다. 동학 100주년 되던 그해의 일을 말하는 듯했다. 할머니들을 붙잡고 동학이니 녹두장군이니 하는 말을 꺼내봤자 돌아오는 답은 그 정도의 것이었다. “녹두장군은 몰라.” 그러곤 문답이 끊어졌다.

 농사 이야기가 나오자 분위기는 달라졌다. 올해 여름 날씨가 얼마나 가혹했었는지 한마디씩 했다. “녹두장군은 몰라” 하던 할머니들이 녹두에 대해서는 ‘박사’였다. 누구네에서 녹두 농사를 얼마나 지었고 그 작황이 어땠는지, 지난 장날 녹두 가격이 어땠는지 줄줄 꿰었다. 녹두장군은 골치 아픈 정치고 역사지만 녹두는 일상인 것이다. 또, 다 그렇게 사는 것이다.

황교익 맛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