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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양보 고맙지만 내가 꼭 청구동 찾아가야 하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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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와 JP는 11월 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대통령후보 단일화에 대한 합의문 서명식을 했다. 마침내 DJP가 완성됐다. DJ로선 대권도전의 9부 능선을 넘은 셈이었다. [중앙포토]


1997년 5월 19일 국민회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DJ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수락연설을 했다. DJ는 주먹을 불끈 쥐고 단상을 내리쳐가며 “전진합시다, 싸웁시다”라고 외쳤다. 온건 보수의 이미지를 구축하려고 애썼던 그동안과는 딴판으로 행동했다. 거기엔 배경이 있었다. 밤섬팀 교수들이 “적어도 이날만큼은 대통령 후보의 강력한 이미지를 보여줘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과 맞서 장충단 공원에서 연설하던 70년의 DJ가 돌아왔다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단 하나, JP(김종필 자민련 총재)와의 단일화뿐이었다. 후보 선출 뒤의 기자회견에서 DJ는 “야권단일화 추진위를 결성해 단일화 협상을 시작하겠다. 7~8월 중으로 끝냈으면 좋겠다”고 협상 시한까지 못 박았다.

이틀 뒤 연세대에서 ‘21세기 한국의 진로’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는데 “내가 대통령이 되면 참여 정치(이 단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니라 DJ가 처음 썼다)와 권력 분산을 이루겠다. 대통령이 모든 걸 다하는 시대는 지났다. 집권하면 삼권분립과 총리의 권한 강화를 통해 국민과 함께 미래를 열어 가겠다”고 말했다. JP에 대한 노골적 구애였다.

애타는 DJ와는 상관없이 JP는 ‘만만디(漫漫的-천천히)’였다. 오히려 거꾸로 갔다. DJ가 연세대에서 연설한 날 JP도 대전 목원대에서 특강을 했다. 여기서 JP는 폭탄 발언을 했다. “내각제 개헌은 나라의 미래를 준비하는 차원의 결단이다. 단일화가 어렵다면 각각 나가는 수밖에 없다.” 여차하면 단독 출마한다는 얘기였다. 이런 마당이니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단일화 추진위 구성도 무기 연기였다. 동교동에선 죽을 지경이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자민련 안에는 DJ의 우군도 존재했다. 박준규 전 국회의장과 박철언 부총재였다. 박 전 의장은 60년대에 DJ·YS(김영삼 대통령)와 함께 청조회(淸朝會) 멤버로 활동했고, 그때 세 사람은 친구처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박 전 의장은 YS가 대통령이 된 뒤 국회의장직에서 사실상 쫓겨났다. 그런 구원(舊怨)이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지만 박 전 의장은 JP가 DJ와 손잡지 않으면 자민련을 탈당하겠다고 압박했다. 박철언 부총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합당은 YS보다 DJ와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전력이 있다. 그 뒤 YS가 대통령이 된 뒤 고초를 겪었다. 그런 박 부총재도 다양하게 DJ를 측면 지원했다.

그런데 JP는 당시에 왜 그리 미적거렸을까. 단순히 지분과 몸값을 올리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신한국당 이회창 고문의 최측근이던 서상목 전 의원은 얼마 전 자서전을 펴냈다. 서 전 의원에 따르면 당시 JP와 신한국당은 DJ 몰래 서로 연대하는 방안을 논의했다는 것이다. 서 전 의원은 “나는 JP를 껴안고 함께 가자고 했으나 이회창 후보가 거절했다”고 말했다. 만일 이 연합이 성사됐다면 DJ의 대통령 꿈은 영원히 물 건너 갔을 것이다. 그런 걸 보면 인생사는 참 반전의 연속이다.

6월 4일 DJ는 ‘혼자서 김칫국 마시는’ 듯한 결정을 하나 내렸다. 국민회의 단독으로 ‘야당 대선후보 단일화 추진위(대단추)’를 발족시킨 것이다. 위원장 한광옥 부총재, 부위원장 박상천 원내총무였다. 자민련은 미동도 없지만 우선 밀어붙이고 보자는 거였다.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JP를 회유했다. 6월 13일에는 내각제 수용의사까지 밝혔다. “우리 당의 목표는 신한국당 정권의 종식이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 자민련과의 후보 단일화 협상에서 내각제를 수용할 생각을 갖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신한국당이 내각제를 같이하자면 하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JP와 자민련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역사나 인생이나 때론 전혀 생각지 않던 곳에서 일의 실마리가 풀리는 법이다. 표류하던 DJP 연합에 자극제가 된 건 엉뚱하게도 신한국당 이인제 전 경기지사였다. 2월에 출마 선언을 했을 당시 이 전 지사의 지지율은 2%에 불과했다. 별것 아닌 열대성 저기압 수준이었다. 하지만 TV토론을 거치고 나자 서서히 태풍의 골격과 형태를 갖춰 갔다. 6월 14일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은 마침내 20%대를 넘어섰다.

제일 다급한 건 DJ였다. 이 전 지사가 더 커지기 전에 빨리 DJP를 완성한 뒤 공격에 나서야 하는데 이도 저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산 출신인 이 전 지사의 급부상은 동시에 충청권의 오랜 맹주였던 JP의 추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DJP 단일화의 첫 단추는 하늘에서 이뤄졌다. 광주대 이사장이고 국민회의 비례대표인 김인곤 의원은 JP와 개인적으로 매우 가까웠다. 김 의원은 6월 20일 광주대 개교 27주년 기념 행사에 DJ와 JP를 함께 초청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같은 비행기를 탔고 하늘에서, 그러니까 비행기 속에서 40여 분간 대화를 나눴다. 광주대에 도착해서는 이사장실에서 다시 10여 분간 단 둘이 만났다. 이 회동 직후 DJ는 “자민련 전당대회(6월 24일)가 끝난 뒤 단일화 협상을 하기로 JP와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DJ가 얼마나 속이 후련했을지는 물어보나마나일 것이다.

7월 2일 마침내 자민련도 ‘대선후보 단일화협상을 위한 수권위원회(대단협)’를 발족했다. 김용환 부총재가 위원장이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 협상 대표들은 7월 11일 63빌딩에서 상견례를 했다. 내각제 개헌, 신한국당 후보와의 관계, 권력분점을 통한 연립정권 수립 등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됐다. DJP가 권력을 잡으면 그걸 뭐라고 부를지에 대해 DJ는 “연립정권이라고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자민련 김용환 부총재가 “연립정권은 내각제일 경우만 해당하니 공동정권이라고 부르자”고 주장했다. 연립정권이라고 하면 국민회의가 중심이고 자민련은 끼어드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7월 15일 DJ는 5강(强)3약(弱)론을 제기했다. 5강은 ▶신한국당 내분 ▶YS의 약화 ▶국제사회에서 현 정권 고립 ▶정권교체 여망 고조 ▶TV토론회 도입이었다. 경계할 것 세 가지는 ▶만성화된 패배주의 ▶방관주의 ▶분열주의라고 했다. 그러면서 “야당의 정권교체 기회가 무르익었다”고 자신했다.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는 7월 21일에 선출됐다. 이회창 고문이었다. 이인제 후보가 패배한 것이 DJ로선 다행이었다.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DJ는 7월 22일 열린 후보 단일화 제1차 공식회의 때 ‘권력균분론’을 제시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 중 다음 정권 초기 2년 반 동안 대통령을 지낸 쪽은 다음 2년 반 동안 총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자신은 대통령을 한 뒤 내각제가 돼도 총리는 안 하겠다는 뜻이었다. 같은 달 31일엔 “DJP 단일화를 이룬 뒤 무소속 박태준 의원과 이수성 전 신한국당 고문도 영입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이 즈음의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DJ의 목소리였다. 원래 쇳소리가 나는 데다 목이 자주 잠기기 때문에 TV토론에서 승리하려면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DJ는 짧은 시간에 가급적 많은 걸 전달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말이 빨라져 토론이 아니라 유세처럼 돼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말하자면~’ 등의 상투적인 표현을 많이 쓰고, 전라도 사투리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도 문제였다. 이런 지적을 받은 뒤 DJ는 일산 자택에 남들 몰래 성우를 초청해 정기적으로 발성과 말하기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70대 노(老)정치인의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DJP 단일화 과정에서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생략하겠다. 다만 밤섬팀이 내놓은 ‘준비된 대통령론’이 예상외의 호응을 얻어냈다는 건 지적해야겠다. 원래 이 슬로건은 DJ의 약점인 고령 문제를 희석화하려고 만들었는데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유권자들에게 크게 먹혔다. 준비 안 된 이회창 후보, 너무 젊은 이인제 후보에 비해 DJ는 상대적으로 경험이 많고, 경륜도 깊어 국가적 난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는 분위기를 조성해 낸 것이다. 약점을 강점으로 바꿔 성공한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10월 26일 국민회의 한광옥 부총재가 자민련 김용환 부총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선거가 12월 18일인데 협상을 대체 언제까지 끌고 갈 겁니까? 선거 끝나고 단일화할까요? 우리끼리 합의안 내서 밀어붙이고 안 되면 여기서 끝냅시다.” 한광옥의 마지막 승부수였다. 그런데 귀를 의심케 할 만한 대답이 돌아왔다. “좋다. 10월 31일 대전MBC에서 대선 후보 연설을 하게 돼 있으니 거기에서 JP가 양보의사를 밝히는 것으로 하자. 그리고 DJ가 청구동에 와서 JP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줬으면 한다.”

한 부총재는 뛸 뜻이 기뻐하며 이런 내용을 DJ에게 보고했다. 다음 날 DJ는 동교동에서 추어탕을 시켜 저녁식사를 했다. JP의 청구동 자택에 가기 직전이었다. DJ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봐, 장 동지. JP가 나한테 양보했는데 이러면 된 거(이긴 것) 아니겠어?” “그래도 여권이 단일화되면 힘들어집니다.” “그래, 그럼 지금 상황에서 여권 단일화 가능성을 어떻게 봐요?” “이회창 후보와 YS의 캐릭터가 상호 충돌하니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요. 나도 그렇게 봐. 지금 몇 시예요? 그런데 이거 내가 꼭 (청구동에) 가야 하나?” “총재님, 가셔야죠. 어서 다녀 오십시오.”

DJ는 JP의 청구동 자택에 오후 8시45분에 도착했다. 응접실에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았다. JP는 DJ와의 사이에 있었던 옛날 이야기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했다. DJ는 “대선 후보를 양보해줘 감사하다. 힘 모아 잘해 보자. 정권교체 이뤄내자. 여생을 보람 있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 뭔가 해보자”라고 말했다. 오후 9시20분, JP는 DJ를 문밖까지 배웅했다. DJP는 이렇게 완성됐다.

정리=김종혁 중앙SUNDAY 편집국장 kimch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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