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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가족이 있었노라” … 국군은 죽어서 말하건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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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호 05면

거의 모든 6·25 전사자는 신원을 알려줄 유품 없이 발굴돼 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은 유해-유가족 DNA 비교로 확인한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장면1=1951년 4월 6일 비가 내렸다. 국군 8사단 10연대 병사들은 이날 전남 화순군 지리산 자락에서 공비 토벌 작전을 벌였다. 이십곡리 전투가 치열했다. 여러 병사가 전사했다. 빗속에서, 전사자들은 우비 차림으로 길가에 묻혔다. 나무 팻말에 이름과 전몰일을 남겼다. 그들은 바람 소리, 물 소리를 벗삼아 긴 세월 잠들었고 잊혀졌다.

새로 발굴한 6·25 전사자 유해 5759구

그러다 50년이 흐른 2001년 초 군의 ‘6·25 50주년 기념사업단’에 “이십곡리 길가에 전사한 국군이 묻혀 있다”는 제보가 접수됐다. 5월 4개 봉분을 열자 전투화·철모가 쏟아져 나왔다. 모두 26명 유해가 발굴됐다. 삭지 않은 우비도 있었다. 그러나 군번은 없었다. 군번도 제대로 못 달고 싸우던 시절이었다. 팻말도 오래전 사라졌다. 막막했다. 사업단은 육군의 7800장 분량 매·화장 보고서를 뒤졌다. 전투·전사의 기록은 있어도 전사자의 이름은 없었다. 그래도 14명의 DNA를 유족으로 추정되는 사람들과 비교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이 누구인지는 밝혀졌다. 그러나 나머지 12명은 2011년 9월 현재까지 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단장 박신한 대령) 내 유해 보관소의 산화 방지용 중성(中性)지 박스에 하염없이 누워 있다.

#장면2=2000년 사업단에 “국군 5명이 강화군 관창리 공동묘지에 매장돼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인민군의 우회 루트였던 강화도에서도 전투가 잦았었다. 그러나 묘지의 어느 봉분인지 알 수 없어 열지 못했다. 그러다 2006년 강화군이 길을 내기 위해 공동묘지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돌파구가 생겼다. “51년 유격대 5명이 전사해 묻혔다. 매장을 목격했고 그 가운데는 직속상관 박영구 대위도 있었다”는 강모씨의 제보였다. 그는 함께 유격대 활동을 했다고 했다. 당시 이 지역은 1사단 관할. 1사단 전사자 명부엔 추정 전사일이 50년 8월로 기록된 박영구 이등병이 있었다. 계급은 달랐지만 어쨌든 이름은 나왔다. 강씨는 “박영구에게 딸이 있었다”고 증언을 더했다.

신원 찾기에 속도가 더해졌다. 2007년 박 이등병이 남긴 딸이 경기도 고양시에 산다는 게 파악됐다. 그러나 딸은 진저리를 치며 DNA 감식을 거부했다. 한 살 때 아버지가 전사한 뒤 걸인처럼 살아온 세월이 너무 서러운데 그 지긋지긋한 과거를 생각나게 하는 일을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또 시간이 흘렀다.

2010년 10월 무연고 무덤이 개봉돼 18기 유골이 수습됐다. 그중 군인 가능성이 높은 20대 초반 유골 6명을 가려내 DNA를 채취했다. 때마침 딸도 DNA 검사에 동의했다. 6명의 유해 중 하나와 일치하면서 박 이등병이 확인됐다. 제보자가 대위로 오해한 것은 당시 북한 침투 때 가짜 계급장을 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머지 5명은 비교할 DNA가 없어 여전히 침묵의 세월에 잠겨 있다.

6·25 전사자의 한이 쌓여 간다. 전사 군인은 13만7899명, 실종자 2만4495명. 그중 2만9202위는 현충원에 안장됐다. 나머지 아직 찾지 못한 13만 전사·실종자는 남한에 7만8000위, 북한에 3만9000위, 비무장지대(DMZ)에 1만3000위 규모인 것으로 국방부는 추정한다. 2000년 이후 유해 찾기 작업을 통해 2011년 9월 23일까지 5759구를 찾았다. 그런데 그중 겨우 108건만 유가족을 찾았다.

그래서 5651구는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 그들이 남긴 것은 오직 유골뿐. 전엔 그래서 막막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유전자 기법이 유해의 신원 확인에 도입돼 유해의 DNA를 유가족과 비교하면 된다. 문제는 비교할 유가족 DNA가 적다는 것이다. 2003년 시작된 DNA시료 채취가 2011년 9월 23일 현재 1만7265건이다. 발굴 유해보다는 많지만 그중 5759건과 일치하는 DNA는 없다. 감식단은 3만~4만 명의 DNA는 축적돼야 속도가 날 것으로 본다. 그래서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다.

눈이 펑펑 내리는 2009년 2월. 감식단의 이용석 조사과장은 강원도 평창군의 모래재를 넘다가 상이용사 노인을 태웠다. 그는 “전쟁 뒤 나무 하러 가보니 모래재 꼭대기에서 백석산 능선까지 국군 전사자가 많더라”고 했다. 즉시 허리까지 차는 눈을 헤치고 백석산 1042고지로 올라갔다. 뭔가가 있었다. 이곳은 과거 7사단의 격전지. 4월 본격 발굴이 시작되자 M1 실탄, 군복 단추 등과 유해 2구가 발굴됐다. 신원을 보여주는 단서는 없었다. 그런데 감식단의 발굴 작업과 비슷한 시점인 2009년 초 경북 동대구의 DNA 시료채취 캠페인에 한 여성이 전쟁 당시 6개월이었던 아들의 DNA검사를 시켰다. 두 명 중 한 유골과 일치했다. 7사단 권오대 이등병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못 찾았다.

화천군 대성산 일대 1016고지, 753고지에서도 그랬다. 2007월 초 옷이 벗겨진 채 총살된 것으로 보이는 18구 유해가 발견됐다. 3년 뒤 2010년, DNA 캠페인에 참여한 유가족이 있어 그중 한 명이 확인됐다. 2사단 17연대 소속 김상희 이등병. 51년 1월 소대가 무너질 때 전사한 것으로 추정됐다. 나머지 18구는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 2007년 7월 5일 강원도 양구에서 7사단 군복 조각, ‘Lee Tae Yoon’이란 이름이 새겨진 미군 수저와 함께 발견된 유골도 사정은 같다.

유가족 참여가 늘지 않으면 답답한 상황은 계속된다. 감식단의 현지 탐사단 15명은 3명 1개조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244구간으로 나뉜 전국의 전투 현장을 다닌다. 낙동강과 강원도가 특히 많다. 길도 없는 산을 누비며 구르고 말벌에 쏘이며 지금껏 98개 구역 6만6061개 개인호와 5만3570개의 교통호를 확인했다.

감식단 출범부터 일한 베테랑 이 과장은 “그들은 두 번 죽는 거예요. 발굴돼도 확인 안 되면 무명에서 다시 무명으로 돌아갑니다. 차라리 발굴되지 않는 게 낫지…”라며 “후손이 나서야 되는데…. 부모 묘도 안 가는 요즘 세태에 삼촌이나 사촌을 챙기겠습니까”라고 안타까워했다.



※6·25 전사자 유가족의 유전자 시료 채취 참여를 기다립니다. 8촌까지 가능합니다.
장소: 보건소, 문의 1577-5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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