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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 토지조사 ‘함정’ 파놓고 한반도 땅 40% 약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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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호 26면

일제가 토지조사를 위해 측량하는 모습. 일제는 근대적 토지소유 관계를 정립한다는 명분으로 토지조사 사업을 실시해 막대한 토지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만들었다. [독립기념관 소장]

식민통치 구조
③ 토지조사 사업과 토지 강탈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1908년 일본의 대한제국·만주·대만에 대한 수출입 품목을 보면 일본 자본주의의 발달 정도를 진단할 수 있다. 일본이 대한제국에서 가장 많이 수입한 품목은 쌀(44.4%)이고 다음이 콩(大豆·31.1%)이었다. 만주에서는 1위 콩깻묵(大豆粕·62.5%), 2위 콩(27%)이었다. 대만에서는 1위 쌀(41.5%), 2위 사탕(砂糖·38.7%)이었다.

일본이 대한제국에 가장 많이 수출한 품목은 면포(綿布·18.7%)였고 다음이 면사(綿絲·9.2%)였다. 만주에는 면포(12.8%)·목재판(10.6%)이었고, 대만에는 목재판(10.4%)·면포(9.6%)를 가장 많이 수출했다. 일본 전체의 1913년 수출입 품목을 보면 수출 1위는 명주실(生絲·29.8%), 2위 면사(11.2%), 3위 견직물(6.2%)이었다. 같은 해 수입은 면화(32%), 철류(鐵類·7.8%), 기계류(7.0%) 순이었다.

일본은 해외에서 원료인 면화와 그것을 가공할 기계를 수입해 1차 가공을 거쳐 되파는 초기 자본주의 국가였다. 본국의 자본을 식민지에 투자하거나 생산품의 독점적 시장으로서 식민지가 아니라 낙후된 일본의 내지(內地) 개발이 더 시급한 상황이었다. 1910년 일본의 연평균 노동쟁의는 10여 건이고, 참가 인원도 1000여 명에 불과했다. 일본은 전쟁과 더불어 성장하는 전형적인 국가 주도의 군산(軍産)복합체 자본주의 국가였다. 일본의 자본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와중에 급속도로 발전해 1918년께 노동쟁의 건수가 500여 건, 참가인원이 7만여 명에 달하게 된다.

1 공출을 강요하는 포스터. 일제는 1940년대 전시 식량을 비축한다는 명목으로 공출을 강요하지만 그 전부터 조선의 쌀을 수입해 갔다. 2 조선의 토지매매문기(1673). 한상세란 인물이 김계남의 부인 김소사로부터 토지를 매입한다는 문서인데 손도장까지 찍은 위조 불가능한 문서였다.

식민지에 투자할 자본이 없으니 ‘자본 없는 자본 형성’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자본 없는 자본 형성이란 자본을 투자해 그 이윤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나 산림·광산·어장 같은 원시적 자본을 빼앗는 자본 축적 형태를 뜻한다. 한국 강점 초기에 일본에선 한국 투자에 대한 안내서가 많이 출간되었는데 ‘소자본을 가진 자는 자금업을 하는 게 가장 좋은 장사’라고 쓰여 있었다. 담보로 잡은 토지를 빼앗는 고리대금업의 천국이란 뜻이다.

이렇게 민간과 조선총독부 모두 조선의 토지에 눈독을 들였다. 일제가 봉건적 토지소유제도를 근대적 토지소유제도로 대체한다는 미명 아래 1910년부터 1918년까지 대대적인 토지조사 사업을 실시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강제합병 이전부터 황실 및 국유 재산에 큰 관심을 기울인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 퇴위를 강요하던 1907년 7월 4일 일제는 이미 ‘임시 황실 소유 및 국유재산 조사국[臨時帝室有及國有財産調査局]’을 출범시켰다. 일찌감치 황실 및 국유재산을 점찍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는 강점 1년6개월 전인 1909년 2월 일본흥업은행으로부터 1000만 엔을 토지조사 비용으로 승인받고, 이듬해 1월에 ‘토지조사사업계획’을 수립했다. 그해 3월에는 토지조사국 관제를 공포하고 강점 일주일 전인 8월 23일 ‘토지조사법’을 공포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 조선총독부 시정연보(施政年報) 서문에서 “토지조사는 지세(地稅) 부담을 공평하게 하고, 지적(地籍)을 명확히 하여 그 소유권을 보호하고, 그 매매·양도를 간첩(簡捷: 간단하고 빠름)하고 확실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표방했다. 하지만 실제 목적은 황실 및 국유 토지를 빼앗아 조선총독부 소유로 만들고, 지세(地稅)를 늘려 조선 통치자금으로 삼는 데 있었다.

토지 강탈에 목적이 있었으므로 조선 전래의 토지소유제도는 봉건적인 것으로 부인해야 했다. 조선의 경국대전(經國大典)호전(戶田) ‘양전(量田)’조항은, “모든 토지는 6등급으로 나누어 20년마다 한 번씩 다시 측량한 뒤 토지대장을 만들어 본조(本曹: 호조)·본도·본 고을에 각각 보관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토지 매매의 기한[賣買限]’조는 “토지와 가옥의 매매는 15일을 기한으로 하되 변경시키지 못하며 모두 100일 이내에 관청에 보고하고 확인서[立案]를 받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조선 후기 노론 일당독재가 계속되면서 토지대장에서 누락시킨 은결(隱結)이 늘어났지만 대부분의 토지는 조선의 이런 토지제도에 따라 관리되고 있었다. 일제는 이런 토지소유 관계를 봉건적이라고 무시했다.

토지조사 사업의 가장 큰 문제는 수조권(收租權)을 무시한 데 있었다. 세금을 거두는 권리인 수조권이 왕실 또는 국가기관에 있는 토지가 공전(公田), 개인에게 있는 토지가 사전(私田)이었다. 그런데 수조권은 국가에 있지만 실제로는 경작자가 대대로 세습하는 사유지인 민전(民田)이 상당했다. 일제는 이런 다양한 형태의 토지소유관계를 무시하고 단순하게 왕실·관청에서 세를 거두었으면 국유지, 개인이 세를 거두었으면 사유지라는 이분법으로 나누었다. 그래서 상당수 사유지가 국유지로 돌변해 조선총독부 소유가 되었다.

신고제를 채택한 것도 제도의 맹점을 이용해 토지를 가로채려는 간계였다. 토지조사령 제4조는 “토지 소유자는 조선총독이 지정하는 기간 내에 그 주소, 씨명(氏名) 또는 그 명칭 및 소유지의 소재, 지목(地目), 자번호(字番號: 땅의 번호), 사표(四標: 사방 경계 표시), 등급(等級), 지적(地籍), 결수(結數)를 임시 토지조사국장에게 신고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신고방식이 대단히 복잡할 뿐만 아니라 관습적인 토지소유의 경우 이런 문건을 만들기 어려웠다.

일부 친일 성향의 사대부들과 모리배들은 이런 토지는 물론 마을의 공유지도 자신의 소유라고 신고했는데, 조선총독부는 이들을 식민통치의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에 특혜처럼 인정해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반면 식민통치체제를 거부하는 반일 사대부나 양민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다. 신고를 거부하면 조상 전래의 토지를 빼앗길 상황이었다. 전라도 장성에 거주하던 변만기(邊萬基)는 봉남일기(鳳南日記)에서 ‘토지조사 사업 때 친일파들의 농간으로 조상 전래의 집과 토지를 빼앗기는 경우가 많았지만 황주 변씨 문중은 종회(宗會)를 열고 공동으로 대처해 끝내 피탈(被奪)을 모면했다’고 전하고 있다.

양반 사대부들도 토지를 빼앗기는 판국이니 일반 상민들이야 말할 것이 없었다. 소유지의 사방에 세우는 푯말이 사표(四標)로서 이른바 ‘총독부 말뚝’이었다. 면장·이장 등의 입회 아래 토지를 답사해서 사방에 세워야 했는데, 친일 모리배가 사표를 세웠는데 항의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대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그래서 대일 항쟁기 때 ‘총독부 말뚝’이란 용어는 무리하게 남의 것을 차지하려는 욕심 많은 자들에 대한 야유로 널리 사용되었다.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를 확립한다는 이 사업 과정에서 황실·관청 소유 토지는 물론 신고에서 누락된 토지, 수조권은 국가에 있었지만 사실상 개인 소유였던 토지들이 대부분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관습적 소유관계와 마을 공동 산이 많았던 임야의 경우 더욱 넓은 면적이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1918년 11월 2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의 성대한 종료식(終了式)을 거행했는데, 이 사업으로 조선총독부가 차지한 토지와 임야가 전 국토의 40%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을 정도였다. 9만9400여 건의 토지소유권 분쟁 중 65%에 달하는 6만4500여 건이 국유지에서 발생했다. 조상 전래로 내려온 사유지를 국유지로 편입시켰기 때문이었다.

토지조사 사업을 거치며 많은 자작농이 전호(佃戶: 소작농)로 전락했다. 토지조사 사업 결과 자가(自家) 경작과 전작(佃作)을 겸하는 반전호(半佃戶) 농가, 순수한 전호(佃戶)를 합친 비율이 전체 농가의 77%에 달했다. 약 3%에 불과한 전주(田主)층이 77%의 전호(佃戶)를 지배하는 수탈 농업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되었다.

가장 큰 전주(田主)는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였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날 무렵인 1918년께 동양척식회사의 토지는 설립 당시의 1만7000여 정보에서 7만4000여 정보로 4배 이상 늘었으며, 지배하는 전호(佃戶)가 15만여 명에 달했다. 토지조사 사업에는 지세(地稅) 수입을 늘리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 결과 과세지 총면적이 424만9000여 정보로서 종래의 286만7000여 정보보다 두 배 가까이 늘어났고, 지세는 내국세 총액의 약 40%에 달하게 되었다. 일제는 토지조사 사업으로 조선총독부의 재산을 대거 늘리고 세입도 대폭 확충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둔 것이다.

토지조사 사업이 끝난 이듬해 전 민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일제의 폭력적인 토지수탈 사업에 대한 전 민족적 반감이 팽배했고, 이것은 3·1운동에 일반 민중이 대거 참가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