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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법정 선 지진학자 … 21세기 ‘갈릴레이 재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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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베르나르도 데 베르나르디니스 전(前) 이탈리아 민방위청 기술부국장(오른쪽)이 20일(현지시간) 라퀼라 시에서 열린 재판에 참석, 심리 개시를 기다리고 있다. 왼쪽은 그의 변호사. 데베르나르디니스는 2009년 이 도시에서 대지진이 발생하기에 앞서 위험 경보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소됐다. 당시 민방위청 회의에 전문가 패널로 참석했던 대학교수 등 과학자 6명도 그와 같은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돼 세계 과학계에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라퀼라 AP=연합뉴스], [중앙포토]


세계 과학계가 이탈리아 때문에 들끓고 있다. 이 나라 최고의 지진학자들을 2009년 라퀼라 지진 때 위험 경고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정에 세웠기 때문이다. 308명의 희생자에 대한 과실치사(manslaughter) 혐의다. 죄가 인정되면 최고 15년의 징역형을 받는다. 이탈리아 ANSA통신은 이들이 5000만 유로(약 786억원)의 손해배상 요구도 받고 있다고 전했다.

2009년 지진으로 폐허가 된 라퀼라 시 모습. [라퀼라 AP=연합뉴스], [중앙포토]

 20일(현지시간) 시작된 재판에 회부된 과학자들은 엔조 보시 전(前) 이탈리아 국립지구물리·화산학회장, 클라우디오 에바 제노바대학 물리학과 교수 등 6명이다. 검찰은 이들이 대지진 발생 6일 전 민방위청 주최 회의에 참석해 “‘대지진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부정확하고, 불완전하며, 모순되는 정보를 제공해 대참사를 초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라퀼라에선 6개월간 수백 차례의 미진(微震)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학자들이 경고만 제대로 했더라면 시민들을 대피시켜 인명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란 주장이다.

 하지만 피고들 얘기는 다르다. “현재의 과학 수준으로 100% 정확한 지진 예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나름대로 최선의 과학적 조언을 했을 뿐인데, 그 결과가 틀렸다고 단죄하는 것은 자신들을 방재대책 실패의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것이란 주장이다.

 세계 과학계의 반응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 5200여 명의 학자들은 재판을 앞두고 조르조 나폴리타노 이탈리아 대통령에게 기소된 학자들의 구명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보냈다. 이에 동참한 연세대 지구시스템학과 홍태경 교수는 “지진 예보는 모든 지진학자들의 궁극적 목표이지만 아직까진 신(神)의 영역일 뿐”이라며 “학자들의 발표에 대한 판단은 관련 학계에 맡겨야지 법적 잣대를 들이대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이번 재판을 ‘제2의 갈릴레이 재판’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중세 시대 지동설(地動說)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교황청에 소환돼 재판을 받은 이탈리아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의 경우에 빗댄 것이다.

 ◆조기 경보에 초점=역사상 지진 예보가 정확히 맞은 경우는 딱 한 번뿐이다. 1975년 중국 하이청(海城) 지진(규모 7.3)이다. 당시 하루 전 대피령이 발령돼 인명 피해를 크게 줄였다. 하지만 1년 뒤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탕산(唐山) 대지진(규모 7.8)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지진 예보가 힘든 이유는 땅밑 지질 구조가 천차만별인 데다 지진 발생에 워낙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같은 크기의 응력(應力)을 받아도, 암종(巖種)과 지하수 유무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빚어지는 것이다. 라퀼라의 경우처럼 미진이 이어진다고 꼭 대지진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경우는 전체의 5%에 불과하다.

 그 때문에 일본·대만 등은 지진 발생 후 최단 시간 내에 경보를 발령하는 시스템 구축에 공을 들이고 있다. 지진파 가운데 상대적으로 속도가 빠른 P파(초속 7~8㎞)를 먼저 포착, 속도는 느리지만 파괴력이 큰 S파(초속 3~4㎞)가 닿기 전 미리 경고하는 방식이다. 한국 기상청도 2020년까지 10초 이내에 경보를 발령하는 지진조기경보체제 구축을 추진 중이다.

김한별 기자

◆라퀼라(L ’ Aquila)=신성로마제국 시절 건설된 중세 이탈리아의 첫 계획도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건축물이 즐비해 ‘중세의 보석’으로 불렸다. 2009년 대지진으로 대부분 파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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