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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화려한 실패, 잡셰어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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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심상복
경제연구소장·논설위원

30대 초반인 K씨는 5년차 은행원이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고 서울의 중위권 대학을 졸업했다. 월급(수당 제외)은 이것저것 다 떼고 나면 230만원 정도다. 이런 직장인을 기득권자로 몰아붙일 수 있을까.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잡셰어링(job sharing·일자리 나누기) 측면에선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꼭 3년 전 월가의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면서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파고(波高)는 생각보다 훨씬 높았다. 가뜩이나 찾기 힘들던 일자리는 하늘의 별따기가 됐다. 해결책으로 정부는 공공기관과 은행을 상대로 잡셰어링을 추진했다. 같은 일을 여럿이 하자는 것이다. 각자의 노동시간은 줄고 임금도 줄어든다. 당시 정부는 기존 직원을 대상으로 추진하려고 했으나 노조가 완강히 저항했다. 그래서 신입사원 초임을 낮추고 그 여력으로 인턴직원 채용을 늘리기로 했다. 2009년부터 공공기관 초임은 평균 15%, 상업은행은 20%씩 내려갔다.

 K씨보다 3년 늦게, 지난해 2월 들어온 C씨 월급은 160만원 선이다. 34개 은행에 이렇게 임금이 깎인 채 들어온 1~3년차 직원은 모두 6400명에 이른다. 이들이 지난달부터 집단행동을 하고 있다. 같은 일을 하는데도 선배들에 비해 훨씬 낮은 임금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물론 자신의 월급 수준을 알고 입사했다. 하지만 들어와선 딴소리를 하고 있다. 선배 직원들은 이들의 문제에 끼어들길 꺼린다. 잘못 나섰다간 자신들이 손해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집단시위를 이길 장사는 없다. 정부가 며칠 전 조정안을 냈다. 공기업에 대해 기존 직원과의 임금 격차를 단계적으로 없애기로 했다. 지난 3년간 297개 공기업에 깎인 임금으로 입사한 사람은 약 1만8000명이라고 한다. 정부는 기존 직원 임금인상률은 낮추고 1~3년차 임금은 많이 올리는 식으로 격차를 줄이라고 지침을 내렸다. 적용 시점은 지난 7월부터 소급하기로 했다. 잡셰어링 정책의 화려한 실패다.

 은행 경영진은 공기업에 내린 정부 지침을 원용할 방침이다. 하지만 노조는 초임을 무조건 원상태로 올리라고 압박하고 있다. 안 되면 10월에 총파업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정부안은 여전히 초임이 낮기 때문에 입사 5년까지는 선배보다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 잡셰어링은 독일 등 유럽 제조업체에서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에서도 먹힌 이 제도는 기존 직원의 양보가 전제돼야 한다. 하지만 K씨를 포함한 선배 은행원들은 일자리 나누기에 반대했다. 그래서 신입사원 임금만 낮추는 편법을 택했는데 결국 오래가지 못했다.

 통계청 조사 결과 올 3월 현재 전국에 비정규직 근로자는 577만 명으로 전체 임금 근로자(1706만 명)의 34%에 달한다. 이들은 월급과 처우가 정규직에 비해 많이 처진다. 비정규직은 왜 이렇게 늘어났을까. 노조가 기존 직원을 철저하게 보호하기 때문이다. 정규직은 한번 뽑으면 해고하기 힘들다. 하는 일에 비해 월급을 많이 받는 직원도 마음대로 자를 수 없다. 기업들은 정규직을 어떻게 할 수 없으니 해고가 자유로운 비정규직을 점점 많이 채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크레인 위에서 사는 김진숙씨는 지금도 정리해고 반대와 비정규직 보호를 외치고 있다. 상충하는 두 구호를 한 입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노조원도 개개인으로 보면 평범한 시민이다. 상식을 가진 이 사회의 건전한 구성원이다. 하지만 그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이란 조직은 다르다. 기득권을 조금이라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 그런 점에서 노조는 조직원들에게 정말 필요한 조직인지 모른다. 개인이 하기 싫거나 하지 못할 일을 120% 알아서 해주기 때문이다. 노조의 존재 이유가 분명한 것이다. 그 덕에 잡셰어링 유사품은 꽃도 피워보지 못한 채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심상복 경제연구소장·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