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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하철역 공연무대로 개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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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퇴근 길 지하철 플랫폼. 지친 두 다리로 삶의 무게를 겨우 지탱하면서 마지막 열차를 기다려 본 일이 있는가.

열차를 기다리는 2분30초~6분이 그날따라 더욱 고통스럽지는 않았는지. 그럴 때 어디선가 고즈넉한 색소폰 연주가 흐른다면 어떨까. 굳이 드보르자크의 '신세계교향곡' 2악장 'Going Home' 이 아니더라도 좋다.

벌써부터 집에 도착한 것처럼 마음이 따뜻하고 편안하다. 피로에 찌든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주고도 남는다.

서울 지하철이 국내 최대규모의 '공연장'으로 탈바꿈한다.

규모는 1백15개역, 하루 관람객은 3백70만명이다. 화려한 조명도 없이 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곳이 곧 무대다.

오는 19일 오후 5시30분 을지로입구역 만남의 광장에서 인디밴드 '카바레사운드' ,에콰도르 민속공연단 등이 출연하는 개막공연을 시작으로 6월말까지 펼치는 '지하철 예술무대' .지하 공간의 답답함을 해소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무료한 일상에 새로운 자극을 주는 청량제다.

시청.종로3가(1호선), 지로입구.건대입구.잠실(2호선), 경복궁.종로3가(3호선), 충무로.동대문운동장.사당(4호선)등 10개 역사에서 두 달간 시범적으로 운영하고 점차 1백15개역을 모두 문화공간으로 개방할 계획.

지난해 2호선 을지로 입구역에서 열린 마임 공연(7월),에콰도르 민속공연단(11월)등 산발적이고 일회적인 이벤트 공연과는 달리 이번 무대는 서울시지하철공사가 지속적인 기획공연으로 마련한 것이다.

지난달 30일 서울 방배동 지하철공사 강당에서 실시된 오디션에서 홍승찬(음악).이종호(무용).안치운(연극)등 평론가 3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 앞에서 40개팀이 경연을 벌인 끝에 선발된 23개팀이 음악과 춤 등 다채로운 공연 장르를 선보인다.

5~6월 프로그램은 주로 주말 오후에 몰려 있다.

음악과 춤이 각각 11개팀으로 가장 많고 클래식 음악은 바이올리니스트 김낙현(20.연세대 음대1)씨가 유일하게 참가했다.

27일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3호선 경복궁역에서 생상.바흐의 독주곡을 연주할 김씨는 "클래식 음악이라면 어렵게만 생각하는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며 "연습도 하고 무대경험도 쌓을 수 있어 일석이조" 라고 말했다.

심사에 참가한 홍승찬(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씨는 "클래식 연주자들의 참여도가 낮아 아쉬웠다" 며 "지하철 예술무대가 아마추어 음악활동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고 말했다.

음악.무용.연극.전통예술.마임.퍼모먼스 등 공연예술로 꾸며지는 지하철 예술무대는 상업적인 홍보 및 음반판매를 위한 공연이나 유료공연은 배제한다.

격월로 치러지는 오디션을 통과한 사람들은 '지하철 예술인' 이라고 새겨진 허가증을 착용하고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연주한다.

강제적인 금품 요구나 상행위는 일절 금지돼 있지만 바이올린이나 기타 케이스에 승객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놓고 가는 것은 막지 않을 방침이다.

서울지하철공사와 함께 지하철 예술무대를 진행하고 있는 공연예술기획 '이일공'(02-7665-210)은 오디션 참가팀을 수시로 접수하고 있으며 '새로운 예술의 해' 행사의 하나로 월별 기획공연도 마련할 예정.

가장 활발한 단체는 매주 일요일 오후 5시 2호선 건대입구역에서 연주하는 인디레이블 '카바레 사운드' 소속 '오르가슴 브라더스'의 멤버 이승호(32)씨는 "지하철 무대가 확대되면 2호선 연대입구나 홍대입구역에서 연주하고 싶다" 고 말했다.

22일부터 6월 17일까지(일요일은 쉼)2호선 잠실, 1호선 종로3가, 3호선 종로3가, 2호선 을지로입구, 4호선 동대문운동장, 2호선 건대입구, 4호선 사당역을 순회공연하는 에콰도르 민속공연단.

이밖에도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3호선 종로3가역(20일), 4호선 사당역(27일), 1호선 종로3가역(6월3일), 1호선 시청역(6월10일)등을 돌면서 하모니카를 연주하는 장덕진(동남보건대 재학)씨가 눈길을 끈다.

나우누리 아카펠라 동호회(키스싱어스)는 27일과 6월10, 17일 오후 4시 을지로입구역, 6월9일 오후 8시 4호선 사당역에서, 한국바젤요들클럽은 27일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 4시 4호선 충무로역에서 각각 공연한다.

지하철 무대는 거리 공연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자동차 소음과 한겨울의 추위를 피해 거리의 악사들이 지하 공간으로 들어온 것이 시초. 예술이 일상의 공간에 파고든 대표적 예다.

홍보나 매니저도 필요없이 예술가와 관객이 직접 만나는 공간이다.

빈부귀천.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어 예술의 민주화' 를 실천하는 셈이다.

지하철 무대는 콘서트홀과 공개 리허설 사이에 위치한다.

본격 무대 진출을 꿈꾸는 미래의 아티스트들에게 무대경험을 쌓게 해주는 것. 지하철 공간을 무료로 제공함으로써 문화예술의 후원이라는 부수 효과도 거둘 수 있다.

공연장 대관이 사실상 불가능한 아마추어 단체들에게 값진 무대가 제공되는 것이다.

▶외국에선…

뉴욕 지하철에서 공연이 정식 허가된 것은 1989년.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연주자들은 MUNY(Music Under New York)라고 새겨진 소형 현수막 앞에서 연주 허가증을 달고 연주해야 한다.

지정 장소를 벗어나서는 안된다. 플랫폼에서는 앰프 사용도 금한다. 대부분의 밴드들은 환승역 통로나 광장에서 연주한다.

그러나 색소폰 등 혼자 연주하는 예술가들은 플랫폼까지 진출할 수 있다.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역은 '지하철의 카네기홀' 이라고 불릴 정도로 음향조건이 뛰어나다.

밤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짐 그라세크가 연주하는 비발디나 소프라노 웬디 세이베츠가 부르는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들을 수 있다.

매일 2백50만명이 이용하는 런던 지하철은 공연은 물론 문학.미술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왔다.

86년부터 미국 소설가 주디스 셔나이크의 제안으로 벽면 광고를 통해 시(詩)를 소개하고 있다.

또 1908년부터 유명 화가들에게 5천여점의 포스터 제작을 위촉해왔다. 작품당 6천장을 인쇄해 에스컬레이터 옆 벽면에 전시 중이다.

지하철 광고업체인 TDI의 후원으로 매년 50여점의 아트 포스터는 물론 연극.음악회 등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도 무료로 전시해 '예술 후원자'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지하철 옆 테이트 갤러리' (데이비드 부스.1986). '차이나 타운' (존 벨라니.1987)은 역을 알리는 포스터였지만 작품성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파리도시교통공사(RATP)문화부는 매년 두 차례 오디션을 통해 지하철 악사들의 '품질관리' 를 한다.

평일에도 연주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피크 타임은 역시 금요일 오후부터 토요일 오후까지의 주말이다.

1호선의 콩코드역, 4호선의 생드니.몽파르나스역 등 사람이 많이 몰리는 환승역에서 악사들을 자주 볼 수 있다. 허가없이 연주하면 3백50프랑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메트로 연주자 중에는 용돈을 벌면서 무대경험을 쌓으려는 음악원 재학생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아코디언.바이올린.하모니카 등 악기 몸집이 크지 않은 독주자의 경우 열차 안에 타고 연주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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