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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부는 기부천사였다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36호 27면

유난히도 추웠던 지난해 12월, 소박한 차림의 80대 할머니가 둘째 딸과 함께 명동성당의 정진석 추기경 집무실을 찾았다. 할머니는 친정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잘 모시지 못하고 용돈 한번 드리지 못한 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삶과 믿음

2004년 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할머니는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본 정 추기경의 모습이 친정아버지와 닮아 꼭 한번 만나뵈어야겠다고 생각하셨단다. 간절한 바람은 언젠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추기경과 마주앉은 할머니는 무척 행복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셨다.

이야기를 마친 할머니는 “세상에 태어나 잘한 일이 없으니 좋은 일에 대신 써 달라”며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대신해 용돈을 받아달라고 했다. 그 봉투 안에는 1억원짜리 수표 9장이 들어 있었다. 할머니는 닷새 후 한 수도원에도 1억원을 내놓으셨고, 기부 후 통장에는 280만원이 남았다.

남편과 함께 채소장사, 쌀장사를 하며 3남2녀를 키운 한재순(미카엘라) 할머니는 평생을 남들보다 더 부지런하게 일했다. 빠듯한 살림에 돈을 모으는 방법은 아끼고 또 아끼는 것뿐이었다. 한겨울에도 난방을 하지 않고 냉방에서 지냈고 해진 내의와 양말은 기워 입었다.

명동 주교관을 나선 할머니는 곧바로 남편 홍용희(비오) 할아버지가 있는 요양원으로 향했다. 노부부는 두 손을 부여잡고 ‘평생의 소원을 다 이뤘다’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집에 돌아가서도 새벽 4시까지 감사의 기도를 올린 할머니는 “우리 부부가 죽기 전에는 형제들은 물론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동행했던 둘째 딸에게 신신당부했다고 했다.

금슬 좋은 부부는 하늘나라도 같이 가려 했던 것일까. 기부천사 부부의 장례미사가 지난 7월 30일 한날한시에 치러졌다. 파킨슨병을 앓던 할아버지가 선종한 이틀 뒤, 건강하던 할머니도 뇌출혈으로 할아버지를 따르게 된 것이다.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정 추기경은 추도사를 통해 부부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고 “두 분이 평생 근검절약해 교회에 봉헌한 재산은, 단순한 재물이 아니라 부부 평생의 고귀한 삶 그 자체”라며 장례미사에서 유족을 위로했다.

나는 이 부부의 선행이 언론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겸손한 부부를 닮은 자녀들은 한사코 부모님의 이야기가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선행을 더 많은 이들이 알게 해서, 더 많은 ‘기부천사’가 나와야 이 세상이 좀 더 아름다워지지 않겠냐며 유족을 설득했다. 부부의 이야기가 다행히 교계 언론에 소개되고 일반 언론에도 기사화됐다. 많은 분들이 부부의 이야기에 감동하고 많은 칭찬을 보내주었다.

선행과 기부는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여유 있는 생활을 하는 이들이, 내게는 필요 없는 것을 남에게 나눠주는 것도 아니다. 나에게 꼭 필요하지만, 그것을 더 필요한 이들과 나눌 때 더욱 풍성한 나눔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평생의 삶을 나누고 간 부부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선행의 바이러스’로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나가기를 기원한다.



허영엽 천주교 서울대교구 대변인·문화홍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오랫동안 성서에 관해 쉽고 재미있는 글을 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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