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디서나 백두산 바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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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호 27면

언제부턴가 백두대간이란 말이 대중화되면서 학창시절 지리시간에 배웠던 태백산맥은 대하소설 제목으로 그 용도가 바뀌어져 있었다. 신라 말기의 선승 도선(道詵) 국사는 ‘우리 국토는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지리산에서 끝난다’고 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세월 이어진 분단으로 인해 잊고 살았던 민족의 성지 백두산에 대한 부채의식이 이름만이라도 백두대간이라고 환원을 종용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삶과 믿음

키 큰 옥수수밭과 나지막한 콩밭이 조화로운 고원지대의 만주벌판을 한동안 달렸다. 이어서 추운 지방에서 자란다는 늘씬한 자작나무 숲길을 통과했다. “맑은 천지(天池)는 3대가 적선을 해야 만날 수 있지요”라며 조선족 가이드 아가씨는 미리 너스레를 떨면서 우리 일행을 위로했다. 버스와 지프를 번갈아 타고 내리면서도 산과 계곡에 깔려있는 안개가 걷히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마지막 주차장에 당도했을 때 주변 시야는 그야말로 오리무중이었다. 그럼에도 천지를 만나야 한다는 급한 마음에 화산 폭발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오름길을 밟고서 빠른 걸음을 재촉했다.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푸석푸석한 화산재로 뒤덮인 산의 모습은 여전히 불기운이 남아 있는 휴화산임을 실감케 해준다. 얼마 전 언론을 장식했던 ‘조만간 분출설’을 근거 없는 것이라고 마냥 낙관할 수만 없는 형편이였다.

수만 년을 견뎌 온 봉우리가 얼마 되지도 않는 내 몸무게에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푸석푸석한 길인지라 발걸음을 조심조심 뗄 수밖에 없었다. 야트막한 고개를 넘을 만큼 시간을 걸으니 이내 산꼭대기였다. 커다란 기대감으로 인파를 비집고서 아래쪽을 내려다 보았다. 이미 안개로 덮여버린 한 쪽에 푸른 물이 살짝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그것마저 안갯속으로 숨어버렸다. 차분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십 분 뒤 천지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더니 얼마 후 완연한 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에서 “야아!” 하며 한숨 같은 탄성이 쏟아졌다. 천지라는 물기운과 화산이란 불기운이 대비감을 이루면서 산도 물도 제 빛깔이 더욱 도드라졌다.

지금이야 안내원들이 두 눈을 부라리며 경계선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지만 1930년에 이 산을 오른 후 백두산등척기를 남긴 안재홍(1891~1965) 선생은 정상에서 한 시간 정도 걸어서 호숫가까지 내려갔다고 했다. 그 순간을 ‘스스로 정토(淨土)를 밟은 성자 같은 생각이 든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경건하고 엄숙하게 마음을 가다듬고서 물가로 가서 입을 헹구고 얼굴을 씻은 후 두어 잔의 물을 마셨다. 그다지 차지는 않고 얼마만큼 유황의 냄새와 맛이 섞여 있다”는 소감까지 남겼다. 멀리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나의 두 눈으로 당신이 마셨던 그 물맛까지 음미했다.

현재도 여전히 남의 나라 땅을 밟고 가야만 하고, 또 성지보다는 관광지의 의미가 더 강하게 닿아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세태의 흐름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름 막바지에 그 산을 만난 감회와 느낌은 옛사람들의 심경을 읽어내기에 충분했다. 돌아오는 길에, ‘언제나 어디서나 이마를 스치는 것은 백두산의 바람이요, 목을 축이는 것은 백두산의 샘물이요, 갈고 심고 거두는 것은 백두산의 흙인지라 떠나려고 해도 떠날 수 없고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것이 백두산’이라는 최남선(1890~1957) 선생의 글을 다시금 떠올렸다. 하긴 알고 보면 한반도 어디에 있건 백두대간 언저리에 살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원철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한문 경전 연구 및 번역 작업 그리고 강의를 통해 고전의 현대화에 일조하고 있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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